
▲3.1운동 기록화(독립기념관) ⓒ 독립기념관
우리 국민은 사적인 감정은 강해도 공분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35년 동안 국권을 빼앗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일제가 패망하여 쫓겨갈 때 거의 보복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12년 독재가 4·19혁명으로 타도될 때 이승만은 무사했고, 박정희 18년 독재가 무너지고 국장이 치러질 때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 나와 눈물짓고, 사망 반세기가 다 되가는 데 거대한 동상이 세워지고 전두환 8년의 독재가 붕괴되는 6월 항쟁에도 전두환·노태우는 짧은 옥살이가 전부였다. 이명박과 박근혜도 수감된 지 얼마 후 석방·사면되었다. 비상계엄과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을 추종하는 자들이 차고 넘친다.
관용과 용서는 인간의 소중한 덕목이다. 하지만 국권을 빼앗고,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한 수괴와 주요 임무종사자들은 엄중히 처벌함으로써 다시는 아류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예방책 임과 동시에 실정법의 엄격함을 보여주는 법치정신이 사회공동체를 유지하는 방책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산물인 인간은 역사의 엄숙성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엄숙성'과 관련, 찰스 비어드는 "역사 서술은 일종의 신념행위"라고 정의하였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도 공정을 기준으로 기술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기록하고 밝히는 것은 건강한 미래로 가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출신 작가 까뮈는 "과거의 잘못된 범죄에 대해 심판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용인하는 행위"라고 진단했다. 역사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역사의 교훈을 잊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하여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날 수 있다." 라고 무서운 경고를 한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일급 참모로 활약하면서 6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다가 뒤늦게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에 체포되었다. 독일 출신의 미국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단지 통계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떠벌릴만큼 아이히만은 인간 백정이었다.
이 사람의 재판을 참관하고 아렌트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악의 평범성'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히틀러 체제에 부역한 사람들이나 독일 국민들이 그토록 엄청난 인종 학살을 보고도 '평범'했느냐는 의문이었다. 아렌트는 보고서의 결론에서 "생각없이 사는 일상적인 삶이 악의 근원"이라고 진단했다. 광주학살범 전두환의 천수 누림과 짧은 옥살이 끝에 풀려난 이명박·박근혜의 천문학적인 국고갈취·뇌물 등 국정농단과 최근 윤석열 일당의 내란과 관련, 한국사회는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지켜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윤석열 정권은 한·미·일 안보협력이라는 구실로 일본에 굴욕적인 자세를 보여왔다. 사법부의 강제동원배상금을 일본기업 대신 한국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제3자변제안'을 해결책으로 택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묵인하고, 최근에는 일본이 나가타현 사도광산에서 조선인 강제노동을 부정하는데도 이 시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사도광산에서 '강제노동'을 뺀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무엇때문에 일본에 이토록 관대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면에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세운 홍범도장군 등 독립지사들의 흉상철거 시도와, 3.1절 홍보물에 '하얼빈 임시정부'란 표현, 외교부가 발간한 '2023 일본 개황'에서 일본의 '역사왜곡 및 과거사 반성' 발언 사례를 통째로 삭제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았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소홀하거나 냉대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인 행태를 보임으로써 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독립선열들을 상처 입게 만들었다. 대통령은 취임식 때 '국헌준수'를 선서한다. 국헌은 전문을 포함한 대한민국 헌법을 말한다.
3.1혁명정신과 선열들의 독립정신이 훼손되고 민주공화제가 퇴행했다. 그리고 친일·분단·독재·부패의 변통세력이 득세했다. 그런가 하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에서 두 차례나 탄핵된 인물의 기념관을 지으려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장교, 해방 후에는 남로당군사책임자, 4월혁명 후에는 군사쿠데타 주역의 동상을 작년 12월 23일 동대구역 광장에 세웠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발전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갈지(之) 자 행보를 하거나 게(蟹) 걸음을 걷거나 때론 반동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럴 때이면 어김없이 반 역사, 비 지성의 나팔수들이 설친다. 척구폐요(拓拘吠堯), "도척의 밥을 먹는 개는 아무리 제 주인이 악당이라도 주인이 지시하면 요와 같은 성인군자에게도 짖어댄다"는 고사가 새삼스럽지 않는 현실이다.
철학자 헤겔이 말한다.
"반동적 개인의 뒤틀린 욕망이 역사의 진보를 가져오는 아이러니, 역사의 간지(奸智)라도 좋다."
12.3내란 수괴와 그 일당들의 행위를 역사의 '간지'로 단정 치부하면서 '역사적 정화'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창강 김택영은 망명시기 우리 역사를 쓰면서 말했다.
"세상에 역사가 망한 것처럼 슬픈 것 없고 나라 망한 것은 그 다음이다."
오늘 우리는 다시 엄중한 역사의 현장에 섰다. 12.3계엄과 내란 폭동을 주도한 수괴와 그 하수인들을 어떻게 단죄하느냐의 갈림길이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식자들로부터 듣는 가장 난감한 언어가 '조선망국노'였다. 그래서다. '매국노'와 '망국노'가 같은 노예 노(奴) 자가 쓰인 의미를 새겼으면 한다. 나라의 모든 권력이 군주에게 있을 때에도 '필부유책(匹夫有責)'이라 했는데 명색이 민주공화국, 주권이 국민에게 주어진 나라에서 헌정을 짓밟는 폭도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도, 공화주의도 누릴 자격이 없는 구체제의 '신민(臣民)'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역사가 왕조교체, 역성혁명, 반란반정을 모두 치렀으나 한번도 '혁명적 정화'를 이루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토로했다. 그리고 묘청·정지상 등 개혁세력이 김부식 등 수구세력에 타도된 사실을 '조선역사상 제1 대사건'이라 명명하였다. 헌법재판소가 반란 주도자와 주요 임무종사자들을 엄중하게 단죄함으로써 이참에 '역사정의'와 '역사적 정화'의 실현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어느 때보다 주권자인 국민의 관심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아울러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시위하는 분들께 전하고 싶다. 미국 '자유의 여신상'에 새겨진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조그마한 안전을 얻기 위해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국민은 안전도 자유도 얻을 수 없다. 민주와 법치에 충실한 정부만이 최대의 국가 안전을 보장한다."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속물'들이 유유상종 지배하는 부끄러운 시대를 끝장내야 한다. 해방 80년 만에 민주화·경제발전·IT강국을 성취한 위대한 대한국민이 아닌가. 한국의 '민주주의 복원력'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