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대 정원에 반발해 병원을 떠났던 사직 전공의 상당수가 1일 업무 현장에 복귀했다. 이날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2025.9.1 ⓒ 연합뉴스
지난 10월 25일은 동생의 1주기였다. 동생은 구급차 뺑뺑이로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다가 처치도 받지 못하고 집에서 마약성 진통제로 20여 일 버티다 먼 길을 떠났다. 그녀와 마지막 시간을 오롯이 함께 보내야 했던 내겐 아직도 그 시간 시간이 수십 번 돌려본 영화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관련기사:
"의사 없어요, 다른 준비를 하세요" 췌장암 말기 환자 가족이 들은 말 https://omn.kr/2a09z).
'그래도 받아주는 병원이 있었더라면 응급처치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고통을 줄여줄 처치라도 받을 수 있었더라면 마지막 시간이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지난 1년 회한(悔恨)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를 애도하는 일뿐이다. 납골당 유리 상자에 붙이는 꽃 한 송이가 고작이다. 1주기를 맞아 납골당에라도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집을 나서려는 순간 거실에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 목덜미를 훅 잡아당기는 뉴스 한 자락이 들렸다.
"오늘로써 의료대란은 공시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 오늘로써? 응? 저게 언제 뉴스지? 적어도 내가 알기론 의료대란 종식을 위한 어떤 노력의 과정도 발표된 바가 없었던 것 같은데. 새 정부에선 정부 국무회의도 공개하는 마당에 어떤 협상이나 복귀, 사과도 거론된 바가 없었던 것 같았는데.'
대체 저 뉴스가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겪은 '의료대란'에 대한 소식이 맞는지 궁금했다.

▲2025년 10월 17일 발행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보건의료 위기경보 심각 단계를 해제하기로 했다고 써있다. ⓒ 보건복지부
• 10월 20일 0시부로 보건의료 위기경보 "심각" 단계를 해제하기로 하였다.
•'25.6월 새 정부가 시작되면서 정부와 의료계 간 소통이 재개되었고, 의료체계 정상화를 위한 상호 협력과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상당수 전공의가 수련병원에 복귀하였다.
• "진료량"의 경우, 현재 상급종합병원과 종합병원의 진료량이 비상진료 이전인 평시('24.2월) 대비 95% 수준이다.
• "전공의 복귀"의 경우, 금년 하반기 모집을 통해 7,984명의 전공의가 수련과정에 복귀하여 전공의 규모가 예년 대비 76.2%까지 회복하였다.
10월 17일 나온 보건복지부 보도자료다. 10월 20일 부로 '공식적으로 의료대란 종식'이라니 나는 며칠 지난 뉴스를 본 셈이다. 많은 현안들 때문에 묻힌 걸까? 사과했는데 혹시 듣지 못했나? 쏟아지는 궁금증으로 지나간 소식들을 검색했다.
정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소식인데 화가 났다.
선전포고는 용대가리, 사과는 뱀꼬리

▲출구 없는 의정갈등전공의 집단 이탈로 시작된 의정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2024.8.2 ⓒ 연합뉴스
의료계의 집단 행동 시작은 삼척동자도 다 알 만큼 요란했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환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선전포고였다. 집단으로 가운을 벗어 반납하는 퍼포먼스도 모자라 대한의사협회가 나서서 국민을 볼모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환자와 환자 가족들은 그들의 선전포고에 벌벌 떨어야 했다. 걱정은 현실이 되고 몇 명이 어떻게 죽어야 했는지도 모르는 채 죽었다. 인명을 쥐락펴락 했던 그들이 돌아왔단다. 그것도 밤새워 내린 이슬처럼 소리도 없이. 그래서 의료대란은 종식된 거란다.
'의료대란'이 미친 사회적 파장에 비해 사과는 아주 미미했다. 사과 주체는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일부 집단에 집중되었고, 대한의사협회 전체 차원의 단일·일괄적 사과 메시지로 보도된 것은 제한적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구렁이 담 넘듯 슬그머니 밀고 들어와 제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럼 그들은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가 되는 건지 묻고 싶다.
'의료 대란' 중에도 의료 현장을 지킨 의료진도 분명 있었다. 그들은 응급 환자를 진료하며 환자와 함께 화내고, 함께 울었다. 그리고 미안해했다. 그래서 오히려 환자가 더 미안했다. 아픈 것이 미안해 다시 고개 숙여야 했다.
슬그머니 돌아온 그대들, 부디 양심에 등불을 켜길 바란다. 소리 내서 사과할 용기도 없다면 그저 돈 만큼 일하는 기술자라 자처해야 한다. 또다시 의료대란의 기수가 되려면 인술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그대들이 했던 의료대란 선전포고처럼 크게 사과할 수 없다면 어떤 사회적 존중도 사양해야 한다. 그저 수많은 직업인의 한 사람으로 어떤 특혜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 없는 '의료대란 종식', 이래도 되는가
전 국민의 목숨을 볼모로 1년 8개월간 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기에 빠뜨린 '의료대란 종식' 선언은 의·정 간 협의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국민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완전히 무시된 처사다. 의료대란 속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거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공식적으로 신뢰할 만한 통계도 없다. 적어도 피해 현황은 파악해야 하지 않는가? 종식 선언을 전후한 의·정의 진정성 있는 사과도 있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은 협상에서는 적어도 국민의 생명을 볼모 삼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부의 '의료대란 종식 선언'은 더 확고하고 단호해야 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협상은 이제 그만

▲동생의 1주기를 맞아의료대란 중 동생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이제 1주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과거의 시간이 아닙니다. 남겨진 가족에겐 지난 1년은 항상 오늘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오늘입니다. 적어도 통증완화 치료라도 받을 수 있었더라면 … 남은 가족들은 그녀의 마지막 고통을 기억 속에서, 꿈속에서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 권미숙
이제 외교 슈퍼 위크도 끝났다. 지난 10월 하순 정국은 어수선했다. 새 정부의 첫 국정감사, 한·미 관세 협상, 에이팩(APEC) 등 굵직한 현안들로 뉴스가 쉴 새 없이 바뀌는 동안 '의료대란 종식' 소식은 스크롤 사이로 흘러내린 자막처럼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많은 인명을 앗아간 의료대란 종식만큼은 끝났다는 선언에 앞서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단호한 메시지를 포함해야 한다.
아직 남아있는 의·정 협상 테이블에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올려놓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천명해야 할 것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일은 지난 한 번으로 족하다. 의료대란 피해자들에겐 구급차를 타고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해야 했던 지난 1년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기억 속에서, 꿈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