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 스틸컷 ⓒ 넷플릭스
지난 3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첫 화부터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화는 집에서 평화롭게 잠을 자던 13살 소년이 아침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동급생 여자아이 살해 혐의로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아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본 가족의 삶은 순식간에 엉망이 된다. 부모는 아들의 말을 믿고 그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몽처럼 변해간다.
드라마 각 에피소드에는 부모의 입장과 더불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소년을 인터뷰하는 심리상담사의 시선이 담겼다. 여러 겹의 시선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아들의 내면에 숨겨진 혐오와 박탈감, 공격성이 서서히 드러난다. 주인공 소년뿐만 아니라 학생들 다수가 스마트폰 속 콘텐츠에 영향을 받는 모습도 더해진다.
학교를 둘러보던 형사는 "도대체 이곳에서 배우는 것이 뭐지?"라고 스스로 묻고, 형사를 향해 교사는 "이 아이들은 통제가 안 된다"라고 털어놓는다. 한두 마디의 대사로 스치듯 지나간 교사의 시선도 드라마 에피소드 중 하나로 더 깊게 다뤄졌다면 어땠을까. 다소 아쉽게 생각하던 중 <기울어진 교실>이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27년 근무한 현직 교사, 그가 본 교실 속 풍경

▲서부원 시민기자의 책 <기울어진 교실> ⓒ 내일을여는책
지난 9월 출간된 <기울어진 교실>은 저자가 현직 교사로서 27년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글로 써 엮은 것이다. 학생들과 직접 대화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는 게 특히 인상적이다. 책은 '어른들은 모르는 고딩의 일상',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 '혐오와 차별을 내면화한 아이들', '아이들에게 보내는 기성세대의 반성문'까지 총 4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상위권 대학으로 '간판'을 바꿔 달기 위해 자퇴와 전학까지 수단으로 활용하는 현실, 점수 1점에 등급이 갈리기 때문에 전쟁터가 된 교실, 마약 근절 공익 광고가 나오는 교실에서 정작 쓰레기통에는 에너지 음료 캔이 쌓여가는 풍경,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학생들 필기 능력이 퇴화하는 상황 등을 소개한다.
정치 시사 유튜브를 보며 키득거리는 아이들의 모습도 담겼는데, 국가혁명당 허경영의 강의가 재미를 준다며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다. 정치인이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 공약이 무엇인지 따지기보다 흥미를 끄는 정치인에 더 관심을 두는 반응을 두고 저자는 "청년세대는 보수화된 게 아니라 '예능화'되었다"라고 표현한다.
1부를 읽고 쉽게 '요즘 아이들' 탓만 할 일은 아니다. 2부는 10대들의 세태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에서 고스란히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에 관해 "하버드 나왔잖아요.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죠?"라며 치켜세우는 아이를 보면 황당한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정작 학생들에게 '좋은 대학 가야 성공한 인생'이라는 듯 서열식 교육 현실을 만든 건 기성세대 아니었던가.
"아이들은 학벌 구조를 골품제에 비유했다. 하버드대 출신이 성골이라면 서울대는 6두품 정도에 불과하다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까지 끌어와 설명했다. 서울대는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바라볼 수라도 있지만, 하버드대는 '넘사벽'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듯 하버드대가 서울대 위에, 서울대는 나머지 대학들 위에 군림하는 건 아이들에겐 공정한 질서다." (94쪽)
혐오와 차별을 내면화한 아이들
책에서 3부 '혐오와 차별을 내면화한 아이들'을 읽고 있자면 점점 더 오싹한 기분이 든다. 수업 중인 교사에게 '페미'인지 여부를 묻는 학생들이 있고, 페미니스트라고 여겨지는 교사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페미니즘'이 요즘 아이들 앞에서 꺼내서는 안 될 금기어가 되어버렸다고도 덧붙인다.
학생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우려스러웠던 저자는 교사로서 성평등에 관련된 서적들을 학생들과 함께 읽고 소감을 나누는 수업을 하기도 했다. 토론이 오가며 차근차근 진행되던 수업 계획은 아쉽게도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전문가 초청 강연에서 학생들은 강사의 말을 끊으며 페미니즘을 향한 혐오를 거침없이 쏟아냈다고 한다.
"이제 '페미 척결'이라는 구호가 더는 극우 청소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들에게서 비롯됐을지언정 이젠 남학생들 다수가 공유하는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여자친구를 사귈 때 '사상 검증'부터 시작한다고 선선히 말하는 지경이 됐다." (176쪽)
'소년의 시간'이 우리 현실과 얼마나 다른가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에서 스마트폰에 매달리며 유해 콘텐츠에 노출돼 범죄까지 일으키는 청소년의 모습은 요즘 한국의 현실과 얼마나 다른가. <기울어진 교실>에서 저자는 "지난 서부지법 폭동 당시 방화 혐의로 10대 청소년이 구속되었고 1심에서 법정 최고 형량이 선고되었다"라며 "그 참담한 소식을 들으며 수업시간에 만나는 아이들의 모습이 포개졌다"라고 썼다. 요즘 세대에 관한 평가나 탄식으로 끝낼 상황이 아니다. "아이들만 탓하자니 뒤통수가 따갑다"는 저자의 말처럼, 결국 지금 우리가 우려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를 보고 배운 것일 테니까.
"지금의 청년세대는 무한경쟁에 주눅이 든 열패감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 무력감 등을 그렇듯 자극적인 유튜브를 통해 위로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부모가 아닌 시대를 닮는다고 했던가. 지금의 20~30대 청년세대는 황폐해진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55쪽)
책에서는 중국 혐오를 비롯한 외국인 혐오, 시험 능력주의 신봉, 페미니즘 혐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 등의 극우적 주장이 교실에서 점점 더 힘을 얻는다고 지적한다. 남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저자는 직접 아이들과 토론도 하고 설득해보려고 시도하면서 아이들의 반응을 듣는다. 비록 그 결과가 항상 긍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저자는 쉽게 학생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수업 중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하는 아이를 보며 "새삼 깨닫지만, 아이들은 나의 스승이며, 난세에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라고 표현한 걸 보면 말이다.
<기울어진 교실>에는 공교육의 붕괴, 교실에도 퍼지는 가짜뉴스, 각자도생을 배우는 아이들 등 2025년 교육계 현실을 압축해 놓은 것처럼 정리돼 있다. 한국의 기울어진 교실을 지금이라도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소년의 시간>에서 아이들을 향해 고개 저으며 "통제 불능"만 되뇌이는 교사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저자가 마지막 장에 쓴 '기성세대의 반성문'을 우리 모두가 함께 다시 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