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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8년간의 배상 소송에서 122명의 미군 '위안부'가 승소했다. 2025년 9월 5일, 117명의 미군 '위안부'들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하겠다고 나섰다.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미군 '위안부'는 새로운 한국여성사를 쓰고 있다. 그렇다. 미군위안부들은 국가폭력이 드리운 긴 그림자와 가부장제 성문화의 깊은 낙인, 사회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뚫고 여성해방과 인간존엄성을 향한 선언을 하고 있다.
 1960~61년 인천 부평 애스컴시티(Ascom City) 앞 기지촌 풍경.
1960~61년 인천 부평 애스컴시티(Ascom City) 앞 기지촌 풍경. ⓒ me&korea

중2, 가을 소풍 때 의정부 송추유원지에 갔다. 친구들과 상의하여, 뻔하고 시큰둥한 소풍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 의정부 시내 구경을 하고, '연소자관람불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 의정부에서는 성인영화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단짝친구와 같이 간 영화관 안은 어두웠다. 어둠에 익숙하기 위해 영화관 벽 쪽에 서 있었다. 갑자기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빛을 만났다. 눈만 빛났지만, 어렴풋이 흑인 병사였다고 느꼈다. 친구와 나는 성인영화를 본다는 흥분이 곧 사그라들어 약속한 듯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시내 행인에게 물어물어 귀가를 위해 태릉 경유 청량리행 시외버스를 찾았다. 의정부 외곽을 달리던 시외버스는 낯선 풍경을 한 '빼뻘마을'(또는 '뺏벌', 캠프 스탠리 주둔지, 2018년 평택 미군기지로 이주)로 접어들었다. 퇴근 무렵 버스 안에는 미군이나 요란한 화장을 한 여성들, 당시 속된 말로 '튀기'라고 불렀던 다양한 컬러의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동네 사람들인지 서로 인사를 나눴다.

버스가 마을 정류장에 정차하자 소위 '미군기지촌'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포르노 잡지가 가득한 책방, 즐비한 판잣집, 식당과 술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의 소년, 소녀들을 봤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색깔 때문에 얼마나 차별받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어머니뻘의 요란한 화장을 한 술집 여성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하는 철없는 동정심과 함께 마음속에 공포의 경계경보가 울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청소년기 머릿속에서 경계경보(레드얼럿, red alert)가 간혹 울렸던 걸 기억한다. 청량리 588번지 지역을 지날 때, 거친 말투에 요란한 외모를 한 여성을 만날 때 울리던 경계경보가 의정부 미군기지촌 뺏벌을 지날 때 다시 울리는 걸 듣게 되었다. '얌전한 여자라면' 몰랐어야 할 세상인가? '착한여자' 측의 엄마에게는 영화관이나 뺏벌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 엄마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성교육은 순결, 정조, 현모양처가 되어야 하되, 양공주·양색시, 588, 술집작부, 윤락녀, 창녀, 화냥년(환향녀), 이혼녀, 노처녀, 가출소녀, 미혼모 등과 같은 존재들은 '나쁜여자'로서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다. 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에는 나쁜여자들이 너무 많았다. 대학에서 신군부정권과의 반독재투쟁을 하던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나는 또 하나의 투쟁을 조용히 치러야 했다. '나쁜여자' 콤플렉스와 직면하기였다.

미군 '위안부' 나쁜여자 만들기

2023년 MBC 드라마 <연인>의 여자주인공은 병자호란으로 청군에 끌려갔다 돌아온, 소위 '화냥년' 또는 '환향녀(還鄕女)'이다. 여주는 괴롭지만 당당하게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했다. 가부장 시대, 학교 역사 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화냥년'이 선택해야 할 길은 '절개 정신'에 따라 자결하는 길이었다. 그런 논리라면 20세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군 '위안부'들도 자결을 해야 했는가?

또한 미군 '위안부'도 죽어야 할 존재이거나 수치스러워 감춰야 할 존재였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비자발적 자살 강요 문화에 의해 조선시대의 대다수 '열녀'가 탄생했다. 그 반면 살아남은 사람은 화냥년으로 사회적 낙인과 배제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20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주류 성문화 속에서 그들은 사회적 차별을 겪거나 침묵을 강요받았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는 새로운 성인식이나 성 해방, 데이트폭력 등의 개념이 등장했다. 조디 포스터(Jodie Foster)가 여주인 미국 영화 <피고인>은 소위 '술집여자'이더라도 강간은 엄연한 성범죄라는 평범한 진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바로 그 무렵 기지촌 발 소식이 들렸다. 1992년 11월 7일, 미군 케네스 마클 일병에 의한 미군 '위안부' 윤금이씨 피살(피살일: 10월 28일)사건에 대한 당국의 소극적 대응을 규탄하기 위한 동두천시민대책위원회와 동두천시민 1천여 명의 보산동 미2사단 정문 앞 집회가 보도되었다. 그 집회에서 어떤 미군 '위안부'의 "금이야~"라고 외치던 피 토하던 목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해방 이후 주한미군에 의한 공식적 최초의 성폭력 사건으로 기록된 것은 1946년 3월 미군 병사 4명에 의한 강간사건이다. 이어 1947년에는 여러 건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목포발 서울행 기차 안에서 미군들이 한국 여성 3명을 '겁탈·윤간'한 사건이 있었고,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미군 5, 6명의 집단 성폭력 사건도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1966년 7월 9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이 조인되기까지 주한미군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한국 여성들은 최소 100여 명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미군 '위안부'에 가해진 주한미군의 성폭력 사건 관련 기사는 경향신문 71건, 동아일보 56건이다. 1967년 SOFA 발효 후 주한미군의 범죄에 대한 한국 재판관할권이 1% 남짓했으니, 주한미군의 범죄가 제대로 보도되었을 리 만무했다. 윤금이씨는 주한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미군 '위안부'에게는 피해가 아닌 가해자 프레임이 씌워 있었다. 전통시대의 화냥년 프레임은 일본군'위안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군 '위안부'에게도 드리워져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양공주', 또 때로는 흡혈곤충인 '갈보('蝎甫, 빈대)'에 '양'자를 붙여 '양갈보'로 불렸다. 한국 사회는 미군 '위안부'에 대해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이나 '미군을 뜯어먹는' 존재라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1970년대에는 미군 '위안부'를 외화벌이를 위한 '산업전사', 때로는 '애국자' 등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밀한 사회적 문제의 하나였던 성병문제와 같은 문란한 성문제의 저변에는 미군 '위안부'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미군 '위안부'는 범죄자로 취급당해야 했고, 타자화되었다. 반면 미군은 "만리타국에서 멸공전을 위해 내한한 유엔군", 전후에는 굳건한 한미동맹을 수행하는 '구원자' 이미지로 치장되어 있었다.

'나쁜여자'의 반대말은 '착한여자'가 아니다. 그 반대말은 바로 가부장제와 그런 성문화를 고착 또는 왜곡시키는 국가주의·군사주의이다. 그래서 '나쁜여자'는 사회의 산물이자 피해자였고, 나쁜여자를 극복하려는 것은 바로 존엄성 회복운동이자 인권운동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미군'위안부'의 인간존엄성 회복의 길

 2014년 12월 19일 서초동 서울 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첫 변론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4년 12월 19일 서초동 서울 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첫 변론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19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 전부터 여자대학생 사이에는 '기지촌 활동(약칭 기활)' 소식이 돌았다. 1986년 미군'위안부'에게 영어를 교육하고 어려운 문제를 상담하며 쉼터를 제공하고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의정부나 동두천에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가 중심이 된 '두레방'이 문을 열었다. 그 두레방에 자원활동을 하기 위해 여대생들이나 여성활동가들이 찾아들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활동가들이 '새움터'도 만들게 되었다. 1992년경부터 1993년까지 나의 절친도 두레방에서 기활을 했으나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곳에 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은 언젠가는 직면하게 될 운명이다. 1999년경 동료들과 두레방을 방문하게 됐다. 2000년에는 새움터의 김현선 대표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눴고, 여성학 강의 특강도 부탁하게 되었다. 급기야 1996년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한국군 '위안부'와도 조우했다. 긴 연구를 통하여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는 연속성이 있는 걸 발견했다 (참고 기사: 한국군도 '위안부'운용했다, <오마이뉴스>, 2002. 2. 22).

또한 안정효 작가의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0)는 1991년 동명 영화(감독 장길수, 1991)로 제작되어 호평을 받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상(이혜숙)과 각본상(장길수 감독)을 받았다. 또한 안일순의 <뺏벌>(1995)은 소설가가 윤금이씨를 추모하며 이태원, 동두천, 송탄, 군산 등에서 '위안부'들과 미군을 인터뷰하여 만든 작품이었다.

2000년이 되어 캐서린 문 교수의 <동맹 속의 섹스>(2002)나 이나영 교수의 <글/로컬 젠더질서와 한반도 여성의 몸: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기지촌 '양공주'>(2013), 박정미 교수의 <건강한 병사(와 위안부) 만들기-주한미군 성병 통제의 역사, 1950-1977년>(2019), 필자의 <그곳에 한국군 '위안부'가 있었다>(2019), 금보운 교수의 <1960~70년대 주한미군 및 가족의 한국 사회 경험과 민군관계>(2022) 등과 같은 연구가 꾸준히 나왔다.

그 사이 윤금이 사건 전이나 후에도 수많은 윤금이가 미군기지, 아니 우리 사회 곳곳에 있었다. 윤금이씨 사건 계기로 꾸려진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와 25개 여성, 시민단체들과 연대한 '주한미군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2018년 11월 발전적 해산)가 1993년 10월 26일 발족되었다.

철통같을 것 같았던 국가주의와 군사주의, 가부장적 성문화가 허위의식을 벗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사자들의 증언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1975년 오키나와 생존 일본군'위안부' 배봉기 씨의 증언과 김학순씨의 증언을 계승하는 김연자씨의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2005), 김정자씨의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2013)의 증언록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2014년 국가배상 소송에는 소송 원고인 박영자씨와 OO숙씨 등도 목소리를 내었다. 잠시 박영자씨의 증언을 보자.

우리에게 국가는 없었습니다. (기지촌을) 도망가고 싶어서 도움을 요청한 파출소는 다시 우리를 포주에게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보건소에서는 고통스럽고 치욕스럽던 성병 검진을 일주일에 두 번이나 해야 했고 성병이 없음에도 토벌, 컨텍으로 보건소에서 페니실린 주사를 맞으며 감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파도 보건소에서는 주사 한 번 약 한번 처방해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기지촌을 형성하고 내버려둔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국가가 형성했으면 그 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봐야 하고 관여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애국자라 칭송한 국가는 기지촌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미군폭력과 악랄한 포주에 대한 처벌을 하지 않았고 인신매매의 창구가 되는 직업소개소를 단속하지 않아 많은 여성들이 기지촌으로 팔려왔습니다. (박영자 증언, 기지촌여성인권연대 심포지엄 중, 2018. 5.28)

원고로 참여한 모든 미군 '위안부'가 박영자씨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미군 '위안부' 원고인은 국가폭력이나 미군폭력에 굴하지 않고 증언했다. 2022년 미군 '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대법원 승소판결 이후에도 10년 가까운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2023년 조촐한 축하의 자리에서 고(故) 김애란 언니는 이제 미군과의 소송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설령 지더라도 싸움을 내려놓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결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애란 언니는 원고로 참여하지 못하는 언니들을 욕하지 말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더 불쌍하고 힘들다고도 덧붙였다.

주한미군 상대로 한 '위안부' 소송의 진정한 의미

 지난 9월 8일 서울 서초구 민변에서 열린 '기지촌 미군 위안부 주한미군 대상 손해보상청구소송'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9월 8일 서울 서초구 민변에서 열린 '기지촌 미군 위안부 주한미군 대상 손해보상청구소송'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2025년 9월 5일, 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117명이 대한민국과 미군을 상대로 국가배상 소송에 나섰다. 원고의 상당수는 70대 이상 노인이고, 구타나 성병약, 영양상태로 인한 노령화로 지병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쓰러져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자세로 소송에 임하고 있다.

앞서의 대한민국 소송은 첫 소송이라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에 주한미군을 상대로 한 소송에는 걸림돌이 더 커 보인다. 가장 큰 걸림돌이라면, '한미동맹'일 것이다. 한미동맹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여도 범죄적 폭력 문제를 덮는 것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하는 것임으로 각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 소송에서도 다양한 증인이 채택되었듯이 이번 미군 소송에도 기지촌 사람들이 보건소 공의(公醫)나 군의관의 증인이 필요하다. 특히 '주한미군 부대에 예속 및 배속된 한국군 병력'(Korean Augu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즉 카투사(KATUSA)들의 증언도 필요할 것이다. 때로는 미군 '위안부' 2세대의 증언도 필요하다. 말이 쉽지, 애증과 회한, 명예의 문제가 얽힌 가족 문제를 법정에서 객관적으로 증언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명예를 되찾고, 수난사를 극복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미군 '위안부'의 인간존엄성 회복운동에는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격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의 법정 투쟁은 단순히 그들만의 인권운동이 아니라, 해방 후 80년간 얽혀 있는 주한미군범죄 문제의 진실에 다가서는 것이자, 젠더갈등과 민족/인종갈등, 계급갈등을 해결하는 화해의 길이 될 것이다.

#미군위안부#주한미군성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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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국의 미군 '위안부', 진실을 향한 투쟁

김귀옥 (freeox) 내방

한성대 교수, 전쟁과평화연구소장이나 도서관 관장 등으로 일해왔다. 성신학원 이사, 한국연구재단 이사, 민교협 상임공동의장, 한국여성평화연구원 원장, 과거사 및 민주화 정부 위원회의 심의/자문위원, 교육부, 통일부, 여성부 등의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관심사는 구술생애사, 분단/전쟁의 문제 등, 평화로운 세상을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 살고자 힘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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