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열사가 '동포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투신한 한국기독교회관 전경 ⓒ 서부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5.18 민주화운동 앞에 '광주'를 이어 붙인다. 공식 명칭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인 줄 아는 이들도 많다. 특별법이 제정된 문민정부 이후 교과서엔 애초 5.18엔 광주라는 지역명이 없었다. 4.19 혁명과 6월 민주항쟁 등에 지역의 이름이 붙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갑작스러운 유신 정권의 붕괴를 틈타 전두환의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그들에 맞선 저항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타올랐고,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서울의 봄'으로 명명했다. 여기서 '봄'은 민주주의를, '서울'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5.17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광주는 하루아침에 계엄군의 '타깃'이 됐다. 모든 도로와 철도, 통신망이 외부 지역과 차단된 채 숱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다. 시민들은 계엄군에 맞서 시민군을 조직해 대항했고,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물러난 22일부터 도청이 함락된 27일까지 닷새 동안 광주는 '절대 공동체'였다.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철저히 광주를 고립시켰다. 대한민국을 '광주'와 '비(非) 광주'로 갈라쳤다. 불의한 권력은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5.18을 김대중의 내란 음모 사건으로 조작했고, 김대중과 가까운 인물들은 느닷없이 내란 세력으로 몰려 치도곤당했다.
수많은 언론이 권력의 충직한 '개'를 자임했고, 독재정권의 품에 안주했다. 김대중은 '반국가 세력의 수괴'로 낙인찍혔고, 그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와 호남 역시 자연스럽게 '반역향'으로 규정됐다. 전 세계가 상찬하는 민주주의의 성지가 독재정권에 의해 더럽혀진 것이다.
"아무리 스마트폰,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도"

▲김의기 열사의 모교인 서강대학교 교정에는 열사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5.18 민주화 유공자로 지정되어 유해가 국립 5.18 민주 묘지로 이장될 때 머리카락 일부가 이곳에 모셔졌다는 안내 표지가 추모비 앞에 놓여있다. ⓒ 서부원
독재정권이 조작한 '광주'의 이미지와 민주화운동이 결합하면서, 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의미조차 왜곡됐다. 요즘 아이들에게 '민주화'가 조롱의 대상이 된 건 그 후과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광주가 독점할 수 없다는 본래 취지가 광주의 '나쁜'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한 술책이라는 오해마저 낳고 있다.
"아무리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해도, 당시 광주의 참상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만약 그랬다면, 5.18은 순전히 광주 안의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혹시 광주 외 다른 지역에도 5.18 사적지가 지정되어 있나요?"
5.18의 공식적인 명칭을 언급하며 광주만의 역사로 규정할 수 없다는 설명에 몇몇 아이들의 대꾸가 이어졌다. 그들의 뜬금없는 질문에 순간 움찔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내용이어서다. 현재 5.18 사적지는 광주와 인근 전남의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아이들의 송곳 같은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찾고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5.18 사적지로 공식 지정된 곳과 역사적 의미, 등재 절차 등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전해 들었다. 진상조사를 통해 사적지로 신규 지정되는 사례가 드물게는 있지만, 광주와 전남 지역 외에는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 기간이 제한되어 있어서다. 5.18 사적지는 유혈 충돌이 발생한 1980년 5월 18일부터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이 함락된 27일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는 현장이어야 한다. 5.18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해당 기간이 아니면 사적지로 지정되기 어렵다.
사적지 지정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이 갖는 위상이 남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고유 번호까지 부여된 사적지가 광주와 인근 지역에만 있다는 건, 사람들에게 5.18이 특정 지역의 일부 주민에 한정된 사건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만든다.
의문이 남는다. 5.18과의 역사적 관련성을 기간으로 한정하는 게 과연 맞느냐는 것이다. 알다시피, 27일 도청이 함락된 이후 그 누구도 5.18의 진실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5.18은 물론, '광주'조차 금기어가 됐고, 유족들조차 불순 세력으로 내몰리는 참담한 세월을 겪어야 했다.
기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광주 알리기'였다. 전두환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5.18의 기억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발악했다. 삼청교육대와 녹화사업이라는 인권 유린의 폭압도,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는, 이른바 '3S 정책'도 5.18의 '원죄'를 씻어내지 못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전두환 정권의 종말을 고한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었을지언정 시발점은 5.18이었다. 6월 민주항쟁 당시 전국 방방곡곡에서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쳤다. 이는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를 단죄해야 한다는 국민 명령의 다른 표현이었다.
6월 민주항쟁으로 독재정권을 끝장낸 위대한 역사는 5.18의 참상을 알리기 위한 수많은 열사의 희생에 빚졌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제단에 희생양을 자처하며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그들이 목숨을 바친 현장 역시 5.18 사적지로 지정되고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독교회관 앞 김의기 열사가 숨진 현장 도로변에 '오월 걸상'이 세워져 있다. 열사의 사진과 그가 배포한 유인물의 내용이 적혀 있다. 오른편 도로는 혜화동 로터리로 이어지는 대학로다. ⓒ 서부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계엄군에 의해 도청이 함락된 사흘 뒤인 5월 30일, 광주 시민들이 무참히 살육당하는 현실을 알리기 위해 투신한 김의기 열사. 그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일갈하며, 유언장 같은 유인물을 제작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던 그가 선택한 장소는 종로5가에 자리한 한국기독교회관으로, 그가 숨진 자리에는 '오월 걸상'의 이름을 붙인 벤치가 도로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는 5.18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된다. 역사적 의미로 보아 5.18 사적지로 손색이 없다.
그의 모교인 서강대학교 교정에는 그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5.18 민주화 유공자로 지정되어 그의 유해가 국립 5.18 민주 묘지로 이장될 때, 그의 머리카락 일부를 이곳에 함께 묻었다고 전한다. 매년 5월 30일 '의기제'를 열어 그를 기리려는 후배들의 정성이 갸륵하다.
그로부터 꼭 열흘 뒤인 6월 9일 이화여대 사거리에서 또 한 명의 청년이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조차 포기해야 했던 노동자 김종태가 분신한 것이다. 며칠 전 그가 믿고 따랐던 교회의 목사 앞으로 의분의 유서까지 남겼다.
그가 살았던 경기도 성남의 작은 동네에선 올해부터 그의 이름을 내건 음악회를 열어 그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를 추모하며 동시에 마을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하는 조촐한 행사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애써 그의 이름을 소환한 장삼이사들의 따스한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5.18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변곡점이라면

▲김종태 열사가 분신한 이화여대 사거리의 모습. 한복판엔 '서윤복 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열사의 추모비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대현 문화공원 안에 있다. 사거리 주변엔 낡고 오래된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기억을 소환한다. ⓒ 서부원
지난 2022년 그가 분신한 현장 인근의 대현 문화공원에 '오월 걸상'의 이름으로 의자가 놓였다. 재개발의 광풍 속에서도 그의 외침을 들었을 법한 낡은 건물들이 여전히 군데군데 남아 있어 당시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이듬해 그의 생활 터전이었던 성남에도 추모비가 섰다.
정작 그가 분신했던 이화여대 사거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대로변에 번듯하게 세워진 '서윤복 길' 표지판이다. 이곳부터 6호선 대흥역에 이르는 도로에 1947년 보스턴 세계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단지 그의 모교인 숭문고등학교가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화여대 사거리의 신호등 앞 근린공원의 이름도 '서윤복 쉼터'로 개칭됐다. 지난 10월 24일에는 '서윤복 길' 개통 1주년 기념식까지 이곳에서 열렸다. 여기서 나고 자란 것도 아닌데 단지 모교가 있다는 이유로 마라토너 서윤복은 이곳을 대표하는 인물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5.18의 진실을 알리려던 청년 노동자 김종태의 이름이 세계 마라톤 대회 우승자 서윤복의 위세에 가려진 모양새다. 민주화운동과 스포츠를 통한 국위 선양에 서열을 매길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기억 속엔 차별이 존재한다. 5.18 사적지로 지정되면 두 이름이 나란해지지 않을까.
요컨대, 어디 두 열사뿐이랴. 우리의 게으른 관행 탓일 뿐, 5.18 사적지는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의 저항과 희생도 중요하지만, 이를 알리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이들과 그들의 자취 역시 5.18의 이름으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5.18이 광주가 독점할 수 없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변곡점이라고 믿는다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사족. 공교롭게도 김의기 열사와 김종태 열사는 국립 5.18 민주 묘지에 친구처럼 옆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생전에 만난 적은 없어도 경상도 출신에다가 한 살 터울이니 하늘에선 서로 친구가 되어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주 알리기'에 목숨 바친 두 인물의 자취는 광주가 아닌, 서울의 한복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