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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빌딩의 사무실 입구에 ‘육사총구국동지회’ ‘전군구국동지연합회’ ‘리박스쿨’ ‘리박코리아’ ‘대한민국역사지킴이’ 간판이 붙어 있는 가운데, 사무실 입구에 '이승만과 박정희를 배우자'는 홍보물이 붙어 있다.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빌딩의 사무실 입구에 ‘육사총구국동지회’ ‘전군구국동지연합회’ ‘리박스쿨’ ‘리박코리아’ ‘대한민국역사지킴이’ 간판이 붙어 있는 가운데, 사무실 입구에 '이승만과 박정희를 배우자'는 홍보물이 붙어 있다. ⓒ 권우성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등 역사왜곡을 주도해온 극우집단이 '이승만 살리기'에 총력전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민족사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리박스쿨'이 윤석열 정권의 비호하에 세력을 형성하고 이승만을 미화하는 책이 속속 출간되고, '국부' '건국의 아버지'란 용어가 거침없이 쓰인다.

최근에는 리박스쿨의 늘봄강사 교제로 활용되는 이승만 미화와 역사왜곡의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이야기>가 전국 623개(2025년 8월 10일 현재) 초중고 도서관에 비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제는 정략적이고 사실왜곡이다. 뉴라이트계열과 보수매체가 일제강점기의 긍정적부각→이승만의 분단정부수립→박정희의 근대화론을 한국현대사의 정맥(正脈)처럼 부각하면서 심각한 역사왜곡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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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비판을 자학사관이라 매도한다. 일본우익이 전범재판·군벌해체 등을 자학사관이라 비판하면서 교과서 왜곡을 주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스스로 '정통'이라 여기면서 남의 사상을 검증하고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사필(史筆)을 잡는 사회는 불행하다. 이승만의 주요 행적을 살펴본다.

(1) 1899년 1월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반정부투쟁을 벌이다 구속돼 서소문감옥에 갇히고 탈옥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기형으로 감형돼 1904년 8월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지원으로 5년7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 기간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기독교인이 되고, <독립정신> 등을 저술했다.

(2) 출감하여 상동교회 부설 청년상동학원의 교장(3주)을 지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미니에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의 출국을 주선한 사람은 친일파로 소문난 미국인 감리교 감독 헤리스였다. 이때 민영환·한규설이 미국정부에 보내는 밀지를 지참했다.

(3) 워싱턴에서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 민영환·한규설의 밀서를 전하고 한·미 수호조약의 이행을 촉구한데 이어 루스벨트 대통령 면담 등, 미국 신문 보도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청년지사'로 알려졌다. 당시 '일진회 대변인'이었다는 기사가 <뉴욕데일리트리분>(1905.8.4)에 게재됐다.

(4) 미국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선으로 조지 워싱턴대학에 이어 하버드대 입학, 미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목적으로 그가 종교지도자가 되길 원해 적극 지원했다.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으로 박사학위, 1776년부터 1872년까지 미국이 국제법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던 전시중립을 다룬 내용.

(5) 하버드 재학 중 교민들로부터 1908년 일제 앞잡이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통역 의뢰를 받고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자 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 교민들의 분노와 반이승만 여론이 확산되었다.

(6) 주한미국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1910년 10월 귀국, 한국은 이해 일제에 병탄. 1912년 초까지 YMCA 학생부·종교부의 간사로 근무, 한국 체류 5년 동안 민족문제, 독립운동은 외면, 오히려 "반일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유학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발언하는 등 반일보다 해외유학을 권려했다.

(7) 총독부가 1912년 데라우찌총독 암살사건을 조작, 신민회간부와 기독교 지도자 등 900 여명을 구속하고 이 중 105명을 기소하는 등 '105인 사건'의 와중에 미국인 친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옥중에서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도움으로 네브라스카주 체스팅스의 소년병학교를 방문했다. 이 무렵 <워싱턴포스트> 회견에서 "(병탄이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1912년 후반까지 뉴저지주 YMCA에서 있다가 박용만의 주선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8) 교민들은 '105인 사건'은 피해왔다고 불만. 이승만은 <태평양잡지>를 발행하고, 잡지와 선전책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무력항쟁과 의열투쟁을 비판하여 교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교민사회가 분열되고, 대한인국민회의 주도권 싸움으로 대조선국민군병단의 박용만 축출, 이때부터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이 대결하게 되었다.

(9) 정한경과 1919년 2월 25일 <위임통치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 "연합국 열강이 현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에 두는 조처를 해달라"는 내용.

(10) 국내의 3·1혁명 소식을 듣고 3월 14일~16일까지 서재필·윤병구 등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기념관까지 가두시위, <미국정부에 보내는 호소문>등을 채택.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한성정부는 실체적 조직보다 '지상정부'의 성격이었다.

(11)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선출, 신채호·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이 '위임통치론'을 들어 반대했다. 그는 미국에 눌러앉아 대통령으로 행세, 임정에서 시정을 촉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1919년 8월 상해임시정부가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제로 개편할 때까지 미국에서 자신을 프레지던트로 부르며 행세했다.

(12) 1년반 만에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 현실성이 없는 외교론만 주장, 임정 내분이 격화되었다. 이동휘·안창호·김규식·신채호·박용만 등이 임정과 결별. 이때 만주에서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등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13) 1921년 5월 1년반 만에 다시 임시정부를 떠나 미국행, 워싱턴 D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14) 1922년 2월 하와이로 가서 이듬해 6월 한인기독학원 남녀학생 20명으로 "하와이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일본 여권으로 한국을 방문케 했다.

(15) 임시정부의정원은 1922년 6월 17일 재적 3분의 2의 찬성으로 이승만 불신임안 의결, 정부수립 6년여 만에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었다. 탄핵사유 중에는 미주 동포들의 독립성금 임의사용 등이 포함되었다.

(16) 상해 임시정부는 1925년 4월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여 윤치영 등을 시켜 명맥을 유지하면서 임시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7) 중·일전쟁의 발발 등 국제정세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1939년 10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구미위원부의 인정을 요구, 임시정부는 미·일 전쟁에 대비, 1941년 6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임정의 주워싱턴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18) 1945년 7월 말 태평양전쟁을 이끌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문으로 강력한 반소·반공입장을 전달, 맥아더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 후 9월 16일 미군용기를 타고 일본을 거쳐 하지와 함께 귀국. 도쿄에서 맥아더·하지와 한국문제에 대해 요담. 미군장교 복장으로 귀국.

(19) 1946년 6월 '정읍발언'으로 단정수립을 처음으로 주장하고, 김구·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방안에 반대했다. 46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등 6개항을 제시하고, 미국의 반소정책을 촉구하는 등 대미활동.

(20) 1948년 5·10총선에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 독립운동가 최능진의 입후보를 봉쇄하고, 6·25전쟁기에 내란음모 협의로 총살형, 정치보복 제1호 희생자.

(21) 제헌헌법의 내각제 시안을 대통령제로 바꾸게 하고 초대 대통령 당선, 친일파 중용하고 반민특위 해체, 김구 암살 배후 의혹. 국회프락치사건도 의혹투성이.

(22) 제주 4·3사건 발발하자 계엄법 제정 이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무회의에서 "강력히 처벌하라"고 지시하여, 3만 명의 희생자 발생.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등 빌미로 국가보안법 제정, 정적 제거와 언론 탄압에 악용했다.

(23) 측근 신성모 국방장관의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타령을 믿고 안보 소홀, 북한군의 6·25 전면남침. 6시간 뒤 경회루에서 낚시 도중에 보고받고, 긴급국무회의는 전쟁 발발 10시간 뒤에야 열려. "국군 서울방어" 라디오 녹음 틀어놓고 6월 27일 새벽 국회에 통보 않고 피난. 한강철교 폭파, 4천명 이상 현장에서 희생, 서울시민 피난길 막히고 3개 사단 병력을 적의 수중에 남겼다.

(24) 6·25 직전 정부는 북한군 남침정보 갖고도 방치한 의혹이 많다. 북한에 첩보원 보내 정보 입수, 육본정보국산하 작전정보실 보고서, 측근 임영신의 개인적 첩보원보고서 등, 북의 남침예상을 방치. 6·25전쟁 직전 이승만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제2대 총선 결과 위기 국면, 전쟁 발발하지 않았다면 1952년 제2대 대통령 당선 불가능.

(25)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 한강철교 폭파해놓고 잔류 서울시민들에게 '부역혐의'로 탄압, 보도연맹원 수만 명의 학살 등 6·25 전후 100만 명의 민간인 학살에 정치적 책임.

(26) 피난수도 부산에서 야당의원을 감금한 채 대통령 직선제 개헌감행하여 장기집권 획책, 이후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보안법파동, 라이벌 조봉암 사법살인, 3·15 부정선거 등 영구집권을 위해 헌법유린.

(27) 경제정책의 실패, 북한보다 경제적 낙후, 반공을 내세워 독재채제를 강화하고 냉전의식 고취, 평화통일론 탄압. 경향신문 폐간 등 언론탄압.

(28) 3·15 마산의거를 '공산당의 조종' 담화. 4·19시위를 '난동'이라 담화. 매카나기 주한미대사에게 "장면의 조종으로 학생시위"라고 왜곡하는 등 시민혁명을 모독. 3·15에서 4·19혁명까지 200여 명의 사망과 수천 명의 부상.

(29) 대국민 사과없이 망명,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

이승만에 '건국대통령'이란 호칭도 걸맞지 않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 건국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으로 이를 '재건'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임시정부 헌법과 대한민국 제헌헌법 '전문'에 나와 있다.

또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거나 '국부'란 표현은 사실(팩트)에도 맞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부합되지 않는다. 세계의 역사는 국부와 관련, 몇 사람을 꼽는다.

미국대통령 - 조지 워싱턴
중국 총통 - 손문
인도 총리 - 간디
터키(튀르키예) 수상 - 캐마르 파스
남아공 대통령 - 넬슨 만델라

이들은 독립운동과 권력의 절제, 도덕성, 청빈 등이 꼽히는 지도자들이다.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현대사#현대사논쟁#현대사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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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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