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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30 11:41최종 업데이트 25.10.30 11:41

왕조의 한 서린 경희궁, 나가는 길에 여기 가보세요

[답사기] 서울 5대 궁궐의 막내... 거듭된 훼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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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가 고분의 도시라면, 서울은 단연 궁궐의 도시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전경. 본래의 자리가 아닌데 정전 영역과 일직선이어서 오해를 사기 쉽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전경. 본래의 자리가 아닌데 정전 영역과 일직선이어서 오해를 사기 쉽다. ⓒ 서부원

오랫동안 이 말에 꽂혀 있었다. 내로라하는 문화유산 전문가마다 한 도시에 다섯 개의 큰 궁궐을 보유한 도시는 세계에서도 드물다며 서울을 상찬한다. 누구든 서울에 왔다면, 궁궐 답사로부터 일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주 '경희궁지'를 답사했다. 아직도 이름에 터를 의미하는 '지(趾)'가 붙어 있는 건,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거나 여전히 복원 중이라는 뜻이다. 1987년 복원이 시작되었지만, 옛 모습을 되찾은 숭정전 영역을 제외하면 궁궐이라기보다 도심 속 녹지 공원의 느낌이다.

아무리 '5대 궁궐'의 막내라곤 해도 거의 존재감이 없다. 주변에 건설된 고층 아파트들이 궁궐의 이름을 끌어다 쓰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경우다. 다른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과 덕수궁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인지도 차이가 크다.

명색이 역사 전공자인 데다 과거 10년 넘게 서울에 거주했고, 틈만 나면 궁궐을 찾아다녔지만, 경희궁 답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나머지 궁궐들은 동선과 전각의 모양까지도 손금 보듯 훤하다. 예약이 로또 당첨만큼 어렵다는 창덕궁 후원도 서너 번은 가봤다.

그림으로만 확인되는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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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희궁지'에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건물은 고작 다섯 개 뿐이다. 정문인 흥화문과 정전의 출입문인 숭정문, 정전인 숭정전, 편전인 자정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태령전이 전부다. 건립 당시 영화로웠던 경희궁의 모습은 '서궐도'라는 그림으로만 확인될 따름이다.

조선 시대 내내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로, 이곳 경희궁은 '서궐'로 불렸다. 각각 이궁으로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별칭이다. 당시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와 '서궐도'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복원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자료다.

 숭정문 앞 녹지 풍경. 건립 당시 건물로 빼곡했을 이곳은 축구장 넓이의 잔디밭으로 조성됐다. 왼쪽 위로 보이는 건물은 서울특별시교육청이다.
숭정문 앞 녹지 풍경. 건립 당시 건물로 빼곡했을 이곳은 축구장 넓이의 잔디밭으로 조성됐다. 왼쪽 위로 보이는 건물은 서울특별시교육청이다. ⓒ 서부원

다만, 경희궁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은커녕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건물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조차 쉽지 않다. 정전인 숭정전의 위치도 건물을 받친 아래 월대의 자취가 없었다면, 복원이 어려웠을 정도로 경희궁은 철저히 파괴되고 지워졌다.

지금까지 보존된 건물인 숭정전과 황학정은 각각 동국대학교와 사직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정문인 흥화문은 신라호텔 영빈관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의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조차 궁궐터가 도시에 편입되면서 원래 있던 자리를 빼앗겼다.

조선 시대에 건립된 궁궐은 조선왕조실록을 실물로 옮겨 놓았다고 할 만큼 풍성한 이야기 창고다. 경희궁의 경우,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된 궁궐인 만큼 더더욱 사연이 많다. 언뜻 황량한 빈 터처럼 보여도, 관심만 있다면 발 딛는 곳곳마다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꿈틀댄다.

지금 경희궁으로 들어오려면, 동남향의 흥화문을 통과해야 한다. 정전과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제자리로 오해하기 쉽지만, 동쪽으로 200m쯤 떨어진 구세군 회관이 본래 세워졌던 자리다. 출입 방향도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처럼 동쪽을 향해 있었다.

궁궐 복원을 위해 애써 가져오긴 했지만,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애먼 간선 도로변에 세워 놓은 것이다. 경희궁이 훼손되면서 흥화문을 뜯어 간 곳은 다름 아닌 박문사였다. 안중근 의사에 의해 피살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운 일본식 사찰이다.

더욱이 그곳은 장충단 곁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일본에 저항하다 숨진 조선의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장충단을 이토 히로부미의 발밑에 둔 셈이다. 조선의 임금이 드나들던 궁궐의 정문을 박문사의 출입문으로 사용한 것이니, 이보다 더 치욕스러울 수는 없었다.

박문사는 해방 후 헐렸고, 지금 그 자리에는 신라 호텔의 영빈관이 자리하고 있다. 흥화문이 다시 경희궁으로 옮겨간 뒤 복제한 건물이 세워졌고, 흥화문 대신 영빈관이라고 새긴 현판이 내걸렸다. 흥화문의 '이주사'는 경희궁을 넘어 우리 근현대사의 곡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흥화문을 통과해 궁궐터 내로 들어서면, 작은 표지석 하나가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기념비다. 궁궐의 위상을 잃어버린 경희궁 터엔 일제강점기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해방 후 같은 공간에 서울 중고등학교가 개교한 것이다.

경성중학교는 식민지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을 위한 학교였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당시 교사(校舍)로 활용됐고, 궁궐터는 일본에서 온 아이들이 뛰어노는 운동장이었다. 조선왕조의 상징적 공간이 철부지 아이들의 놀이터로 전락하면서 경희궁의 위상은 나날이 실추했다.

1980년대 서울중고등학교가 지금의 서초동으로 이전했을 땐, 이곳이 궁궐터였음을 기억하는 이들조차 드물었다고 한다. 기념비에 적힌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터'라는 글귀가 생뚱맞게 느껴지는 이유다. '학문의 요람'이기에 앞서 스러진 왕조의 한이 서린 곳이어서다.

 서울중고등학교 이전 표지석. 경희궁 터에 자리한 서울중고등학교가 1980년 지금의 강남으로 이전했다는 걸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뒤로 서울특별시교육청이 보인다.
서울중고등학교 이전 표지석. 경희궁 터에 자리한 서울중고등학교가 1980년 지금의 강남으로 이전했다는 걸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뒤로 서울특별시교육청이 보인다. ⓒ 서부원

경희궁을 되돌아갈 때 들려야하는 곳

이곳에서부터 숭정문까지는 파릇한 잔디가 깔린, 말 그대로 '경희궁 공원'이다. 건립 당시에는 하늘을 가릴 듯 건물들로 빼곡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상의 영역이 됐다. 웬만한 축구장보다 넓은 잔디밭은 소풍 나온 여중생들의 깔깔거림이 청량한 가을바람에 실려 더욱 파릇했다.

숭정문의 계단을 오르면 정전 영역이다. 잠시 멈춰 서서 옷깃을 여며야 할 것 같은 엄정함이 서려 있다. 임금이 지나다녔을 어도를 중심으로 한, 한 치도 오차가 없는 대칭 공간이다. 더욱이 지형을 따라 월대와 회랑이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규모에 견줘 권위적인 느낌이다.

그 중심에 숭정전이 오롯하다. 바로 이곳에서 인조와 경종, 정조의 즉위식이 거행됐다. 조선 후기 반정과 환국,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올랐던 인물들이다. 외침과 반란 등 극심한 혼란 속에 경희궁은 그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였고, 얼마 동안 정궁의 역할을 했다.

눈앞에서 지켜본 당대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기억하기 싫었던 걸까. 경희궁의 복원 사업이 본격화된 후에도 궁궐의 주인 격인 숭정전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좌를 갖춘 지금 경희궁의 숭정전은 '복제품'이고, 진짜 숭정전 건물은 여기서 한참 떨어진 남산 자락에 있다.

 동국대학교의 중앙 법당인 정각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경희궁의 원래 숭정전 모습. 법당 건물 지붕의 잡상과 어좌가 있던 곳에 정좌한 내부 불상이 이채롭다.
동국대학교의 중앙 법당인 정각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경희궁의 원래 숭정전 모습. 법당 건물 지붕의 잡상과 어좌가 있던 곳에 정좌한 내부 불상이 이채롭다. ⓒ 서부원

숭정전 대신 '정각원'이라는 현판을 걸고, 동국대학교의 법당으로 쓰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사찰인 당시 대화정조계사에 팔렸다가, 해방 후 절터에 세운 대학의 교정에 그대로 남은 거다. 어좌가 있던 곳엔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내부의 변형이 심해 제자리로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궁궐의 정전이 일본 사찰의 법당으로 활용되다 대학의 부속 건물이 된 사연이 낯설다 못해 처연하다. 지붕에 늘어선 잡상들만이 과거 숭정전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정전의 권위는 잃었을지언정 오랜 세월 동안 옛 모습이 보존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경희궁 답사는 숭정전에서 끝난다. 현재 경희궁의 자정전과 태령전은 보수공사 중이어서 올해 말까지 관람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되돌아 나가는 길에 들러야 할 곳이 남아 있다. 복원된 경희궁과 서울 역사박물관의 경계쯤에 세워진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건물이 그것이다.

 일제강점기 말 미군의 도심 폭격에 대비해 조성한 경희궁 방공호의 모습. 뒤로 숭정전을 감싼 회랑의 지붕선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말 미군의 도심 폭격에 대비해 조성한 경희궁 방공호의 모습. 뒤로 숭정전을 감싼 회랑의 지붕선이 보인다. ⓒ 서부원

일제가 패망을 앞둔 1944년에 조성한 방공호다. 미군의 도심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 시설로, 육중한 외관을 자랑한다. 출입구가 자물쇠로 채워져 들어가 볼 수 없지만, 기록에 의하면 총길이가 110m에 격리된 방이 20개가 넘고 외벽의 두께만도 무려 3m에 이른다고 한다.

일제는 궁궐터에 학교와 방공호까지 지어 조선 왕실을 능욕했다. 그렇다고 일제의 만행만 탓할 건 못 된다. 경희궁의 숱한 건물들이 훼철된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며 경복궁을 중건하던 때다. 경희궁을 헐어 경복궁을 지었으니, 아랫돌을 빼서 윗돌 괸 셈이다.

숭정전의 월대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마치 '좌청룡 우백호'인 양 서울특별시교육청과 서울 역사박물관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둘 다 궁궐터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전을 추진하거나, 검토하고 있다지만 경희궁의 완전한 복원은 쉽지 않아 보인다.

 신라호텔 영빈관의 정문. 경희궁의 복원 사업으로 이곳에 있던 흥화문이 옮겨간 뒤 세운 것이다. 흥화문 대신 영빈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신라호텔 영빈관의 정문. 경희궁의 복원 사업으로 이곳에 있던 흥화문이 옮겨간 뒤 세운 것이다. 흥화문 대신 영빈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 서부원

#경희궁#숭정전#흥화문#경희궁방공호#동국대학교정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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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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