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케이팝 구조상 이젠 제2의 BTS는 나올 수 없어요. 케이팝 시스템이 너무 바뀌어서 작은 회사에서 성공하기 굉장히 힘들어졌어요. 자체 콘텐츠 하나 찍는데 유명한 팀이랑 하려면 몇십억 원을 쏟아야 하죠. 예전엔 음반제작비가 SM이랑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어요. 1억으로도, 가난해도 성공한 아이돌을 만드는 게 가능했는데..." (면접조사 참여자 22번)
세계적으로 한국 가요 등 콘텐츠는 호황이지만 안으론 곪고 있다. 이 문제의식 또한 새로운 게 아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자체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종사자들의 면접조사를 실시한 가운데 절대 다수가 해당 산업의 노동 환경과 제반 환경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6월 23일부터 약 한달간 진행된 면접조사엔 가요, 방송 관련 종사자들 29명이 응했다. 엔터테인먼트 소속 홍보, 신인개발팀, 음반제작 담당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등 연예인 근거리에서 일하는 이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위 면접조사를 바탕으로 2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에서 '화려한 케이팝 산업, 이면의 노동을 조명하다'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주최했으며, 이종임 경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노무법인화평의 이종수 대표, 노동건강연대 박한솔 사무국장 등이 발제자로 참여했다.
"24시간 밤낮 구분 없이 업무에 노출"

▲2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에서 열린 '엔터산업 노동자 면접조사 결과 발표 토론회' 현장. ⓒ 이선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채은 기획차장은 "엔터 산업 종사자들 대다수가 과도한 업무량과 잦은 돌발상황, 큰 업무 변동성과 인력 부족 문제에 허덕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티스트를 상대하는 종사자들은 높은 수준의 감정노동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다고 호소했고, 이로 인해 조사에 응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신체 및 정신 건강의 이상 상태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가요계 쪽에선 최근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다는 이유로 주요 종사자들이 24시간 밤낮 구분 없이 업무에 노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채은 기획차장은 "이런 관행들이 결과적으론 업계 전반의 인력 구조가 불안해지는 주요 원인이 된다"며 "엔터 산업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노동구조 면에선 시스템이 확립되지 않았고, 이건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짚었다.
면접 참여자들의 평균 임금은 295만 원으로 집계됐다. 29명 중 400만 원을 초과하는 인원은 단 3명이었다. 이 기획차장은 "일부는 최저시급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었고, 추가 근무 수당을 못 받거나 대체 휴무가 존재해도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제대로 쓴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엔터 산업이 기본적으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하기에 종사자들의 역량이나 성과를 파악하기 어려운 한계도 있었다. 이 기획차장은 "대표 이하 일부 상급자들에게 의사 결정권이 집중돼 있고,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신속한 결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특성상 타부서, 외주 업체, 현장 스태프 등 여러 주체들과 협업해야 하기에 때문"이라 짚었다.
산적한 문제와 과제에도 엔터산업 종사자들이 중심이 된 노동조합이 없다는 것,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개인이 공론화하기 어렵다는 응답도 있었다. 조사 응답자들은 공통적으로 항의했을 때 오히려 퇴사 권고를 받는 등 불이익을 겪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장은 "처음엔 그룹 면접 조사 방식으로 모집했는데 좁은 업계라는 인식으로 자신들의 답변이 퍼질까 걱정하시는 게 느껴져 일대일 면접으로 변경해 진행했다"며 "엔터산업 종사자들이 겪는 문제들은 여전히 사회문제로 고찰되지 못하고 있다"고 현재 상황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종임 경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조사 결과를 보니 오디션 프로그램의 축소판 같다. <케이팝데몬헌터스> 등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엔터 업계 직종이 늘고 있지만, 구조적 문제는 나아지지 않고 있다"며 "업무 분야별로 업무 수행 방식 조사가 우선 이뤄져야 한다. 1886년 미국 뉴욕에서 만들어진 공연 노동자 조합 사례를 참고해 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 공연기술자 노동조합은 설립 초기부터 실리적 조합임을 자처하며 업무 영역의 확실한 구분, 표준 8시간 노동 정착, 공연과 비공연 의무의 분명한 정의 등을 원칙으로 활동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임 교수는 "조사 응답자의 과반 이상이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지만, 그 내용이 모호할 것이다. 이들 노동 방식과 계약 방식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자세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표준계약서와 표준보수지침 마련해야"
노무법인화평의 이종수 대표는 "단기적으론 이런 실태조사를 강화해 꾸준히 진행해야 하고, 장기적으론 산업안전보건체계 구축과 법령 마련을 통해 노사정 협의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종수 대표는 대중문화산업법을 예로 들며 "콘텐츠진흥원에서 2년 마다 대중문화 관련 조사를 하지만 방송, 공연, 영화 등이 다 섞여 있어서 각 영역별 특성을 알 수 없기에 분리 진행할 필요가 있다"며 "내부에서 문제제기시 불이익을 받는 한계로 외부 개입이 필요해 보이는데 근로감독청원제라는 게 있다. 노동조합이나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같은 시민 단체를 통해 신청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특히 이종수 대표는 영화계에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아래 영비법)에 근거해 실시 중인 노사정협의회, 영화인신문고, 성평등센터 든든의 활약을 예로 들었다. 그는 "가요계나 다른 엔터업계에도 표준계약서와 표준보수지침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건강연대 박한솔 사무국장은 이번 조사에 응한 상당수가 청년 여성 노동자임을 짚으면서 "(이들이) 유독 능력 증명 부담을 느끼면서 매 순간 버티고 있다"며 "사회적으로 몸을 쓰는 노동으로 인식하지 않을 뿐 청년·여성·노동자들은 반복 노동 및 장시간 노동을 통해 몸을 쓰는 노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 사무국장은 자체적으로 진행 중인 청년여성 산재회복 지원사업 결과를 언급하면서 고용 불안정 상황에 몰린 엔터업계 종사자들이 건강 문제로 고생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했다. 그는 고용 형태에 상관없이 누구든 산재 보험, 유급 병가 등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채은 기획국장은 토론회 말미 최근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된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를 언급했다. 이 국장은 "그의 발탁이 케이팝 산업을 부흥하기 위함인데, 그 뒤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을 신경 쓸지 의문"이라며 "어떤 조사 참여자는 아이돌은 더욱 빛나지만 그 뒤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은 더욱 갈려 나가고 있다고 하셨다. 이런 분들의 노동 조건 개선이 지속돼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