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로 지정된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조선 초기 세조의 자녀 태를 담았던 내항아리와 외항아리로 알려졌다. 태항아리는 우리의 도자 역사와 흐름을 같이 했다. 도기에서 청자를 거쳐 분청사기와 백자로 변천했다. 1970년 고려대학교 교내 공사 중 발견된 국보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 국가유산청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인구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합계 출생률은 0.75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우리나라 가임기 여성(15~49세)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채 1명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바야흐로 태어난 아기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인구 감소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지난 20년 동안 출생률이 계속 하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와 함께 세계 3대 투자자로 불리는 짐 로저스는 지난 2월 한국을 방문해 "이대로 가면 한국은 30년 안에 사라질 수도 있다"라고 섬뜩한 경고를 한 바 있다.
지금 우리는 유례없는 '인구절벽'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낮은 출생률과 높은 청소년 자살률. 이는 단순히 수치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 사회와 국가경쟁력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절박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아기의 탄생과 생명의 존엄에 대해 어떠한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살았을까. 우리 선조들의 생명존중 사상이 담긴 독특한 문화유산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현실을 반추해 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왕실 자손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번영을 염원하다

▲조선 태조 (1335-1408년)부터 태종(1367-1422년)까지 3대 왕의 태항아리는 도기이다. 태조 이성계의 태항아리(좌)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의 태항아리(우) ⓒ 국립고궁박물관

▲국가 사적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세종의 적서 18 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 국가유산청
예나 지금이나 아기의 탄생은 한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경사였다. 요즘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와 아기를 연결해 주었던 탯줄을 깨끗하게 소독한 다음 예쁜 유리병에 담아 두거나 탯줄 도장을 만들어 보관하기도 한다. 이는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담겨있다.
현대의 탯줄 보관함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옛날에도 생명의 기원인 '태(胎)'를 소중하게 다루는 의례가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엄마의 뱃속에서 9개월간 자라는 태아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탯줄을 곧 '생명의 상징'으로 소중하게 여겼으며 태를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아기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믿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신분의 차이에 따라 아기의 태를 처리하는 규모와 방식이 다른 의례를 적용했다. 특히 왕실에서 왕자의 탄생은 왕위를 계승하고 왕실의 정통성과 안정을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온 나라의 기쁨이었기에 태를 처리하는 방식도 특별했다.

▲숙종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태지석에는 “辛丑年八月十五日卯時生 元子阿只氏胎(신축년팔월십오일묘시생 원자아지씨태)”라고 쓰여있다. 신축년인 1661년(현종 2년) 8월 15일, 오전 5~7시에 해당하는 묘시에 태어난 ‘원자 아지씨’의 태라는 뜻이다 ⓒ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씨가 태어나면 태를 봉안하기 위한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했다. 먼저 태와 태반을 백자 항아리에 넣어 미리 점지해 놓은 산실의 길한 방향에 안치하였다. 3일째 되는 날 태를 꺼내 미리 길어놓았던 깨끗한 물로 백 번 이상 씻는다. 그런 다음 석간수로 빚은 향온주(香醞酒)로 다시 한번 정성껏 씻는 '세태(洗胎)'의식을 거행했다.
세태의식이 끝나면 태를 내항아리에 넣는다. 이때 내항아리의 안쪽 중앙 바닥에 축원의 의미를 담아 동전 한 닢을 글자 면이 밑으로 가게 놓고 그 위에 태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을 덮고 붉은 끈으로 묶어서 봉한 다음 뚜껑을 덮는다. 뚜껑을 덮은 후에 다시 항아리의 네 귀퉁이를 단단히 묶는다.

▲숙종의 아들 연령군(1699~1719)의 태항아리 내항아리 바닥에서 출토된 동전(좌)과 고종의 8번째 아들 이육(李堉 1914~1919)의 태실에서 출토된 목간(우) ⓒ 국립고궁박물관
그런 다음 길일을 골라 내항아리를 외항아리에 집어넣는다. 이때 내항아리가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사이사이에 솜을 꼼꼼하게 집어넣고 외항아리 입구를 닥나무로 만든 초주지(草注紙)로 밀봉한 후 뚜껑을 덮고 끈으로 묶었다. 그다음 뚜껑에 붉은 목패를 매달았다. 목패의 앞면에 아기씨의 출생 연도와 날짜를 적었고 뒷면에 태항아리를 밀봉한 제조와 의관이 서명을 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태항아리는 풍수지리상 길지를 골라 태봉(胎峯)으로 정하여 안장하였다. 공주인 경우에는 태어난 후 3개월, 왕자는 5개월째 되는 달에 태를 묻는 석실인 '태실(胎室)'을 마련하여 아기씨의 이름과 사주 등을 새긴 '태지석(胎紙石)'과 함께 묻었다. 이러한 절차를 '태를 편안히 모신다'라는 뜻으로 '장태(藏胎)' 또는 '안태(安胎)'라고 했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 조선왕실의 많은 태실이 본래 자리에서 옮겨졌거나 훼손됐는데 명종의 태실은 원래 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다 ⓒ 국가유산청
이런 의례는 생명의 근원인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하고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나라가 번영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 왕위를 계승할 원자(元子)의 태실은 미리 정해둔 길지 중에서도 1등지에 태실을 조성했다. 대군과 공주는 2등지에 왕자와 옹주는 3등지에 태를 묻었다. 훗날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면 난간석과 비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이를 '가봉(加封) 태실'이라 했다.
장태를 마친 뒤에는 땅을 주관하는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를 지내 왕실 아기씨와 나라의 복을 기원하였다. 또한 금표석을 세워 왕실 자녀의 태실임을 표시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했다. 이러한 안태의식은 신생아의 탯줄 자체를 또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생명존중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를 소중히 다뤘던 장태문화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따르면 "김유신(595~673)의 태를 만노군의 높은 산에 묻고 '태령산(胎靈山)'이라 불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봉리의 태령산 정상에 김유신의 태실 유적이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태실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충북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태실 중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이다 ⓒ 국가유산청

▲고려청자 태항아리. 고려시대 사용한 태항아리 ⓒ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이후 고려시대에도 많은 왕들이 태실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온다. 조선으로 접어들면서 왕실 차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태실을 관리하였으며 이에 대한 기록을 의궤로 남겼다. 지금도 전국에는 태봉산, 태장동, 태봉리, 태안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 지역에 왕실의 태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는 우리 도자 역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했다. 도기에서 시작된 태항아리는 고려청자와 조선 초기 분청사기를 거쳐 점차 순수 백자로 변화되었음을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 일종의 의례용기였던 백자 태항아리는 기본형태에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으나 조선 후기 들어 왕조의 몰락과 함께 그 위상을 잃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많은 태항아리 중에서 조선 초기 세조의 자녀 태를 담았던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가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왕실의 태실을 파헤쳐 한 곳에 묻은 '일제의 만행'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단종 태실지.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서삼릉으로 옮겨진 후 단종의 태실에는 친일파의 무덤이 들어서 있다. ⓒ 국가유산청
조선시대 신성시 되었던 왕실의 태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라고 알려진 곳이라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에 터를 잡았다. 백성들은 왕실 자손의 태실이 자기 고을로 오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했다. 왕실의 뿌리가 자리한 곳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지역이 승격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현재 태실 숫자는 정확하게 집계된 바는 없으나 180여 곳이 확인되었고 그중 25곳이 국가 및 지방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북도에 100여 곳으로 가장 많다. 이렇게 전국 각지의 명당에 자리한 조선왕실의 태실은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시절에 큰 시련을 겪는다.
1929년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李王職: 대한제국 황실을 '이 씨 왕가'라 격하하고 이를 관리하던 기관)에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 왕실의 태실 54곳을 파헤쳤다. 그리고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꺼내 창경궁으로 모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파손되거나 뒤 바뀌고 심지어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경남 사천에 있는 세종대왕태실지.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훼손되었다. 현재 세종대왕의 태실터에는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서 있고 태실비와 석재 일부가 한데 모아져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이다 ⓒ 국가유산청

▲세종의 태항아리와 태지석. 안태용 도자기로 도기, 청자, 백자 등이 사용되었다. 백자 태항아리는 1601년(선조 34) ‘세종의 태실을 고칠 때 새로 만든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이후 일제는 1930년부터 경기도 고양에 있는 '서삼릉(西三陵)'에 집단 태실과 묘역을 조성하여 왕의 태실 22위, 왕자와 공주의 태실 32위, 도합 54기의 태실을 옮겼다. 서삼릉은 서울 서쪽에 있는 조선의 왕릉으로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과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이 있는 곳이다.
이때 태실뿐 아니라 왕자, 왕녀, 후궁들의 분묘 45기도 한꺼번에 이장했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태실들을 관리하기 어려우니 한 곳에 모아 보존하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일제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조선왕실의 정기를 끊어내고 식민통치를 가속화하기 위해 전국의 태실을 서울 근교에 있는 서삼릉으로 옮긴 것이다.
일제는 서삼릉에 새롭게 조성한 태실을 왕의 태실과 왕자와 공주의 태실로 구분했다. 왕의 태실은 검은색 오색 비석을 세웠고 왕자와 공주의 태실은 하얀 화강석 비석을 세웠다. 앞뒤 좌우로 오와 열을 맞춰 마치 공동묘지처럼 만들어 버렸다.

▲1930년대 일제에 의해 서삼릉으로 옮겨진 조선 왕실의 태실. 마치 공동묘지처럼 오와 열을 맞추어 놓았다. 왼쪽 오석비군이 왕의 태실이고 오른쪽 화강석 비군이 왕자와 공주의 태실이다 ⓒ 국가유산청
태실을 이전한 뒤에는 전국의 명당에 자리한 태실의 터를 개인들에게 팔았다. 이 과정에서 태실을 꾸몄던 석물들은 흩어져 방치되거나 민묘의 석물로 쓰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실제로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사천시 곤명면 태봉산에 있는 단종의 태실(예종의 장남 인성대군의 태실이라고도 함)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의 무덤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태실을 꾸몄던 석물들은 친일파의 무덤을 치장하는 둘레석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왕실의 태실을 파헤치고 그 자리에 친일파의 묘를 썼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일제가 서삼릉으로 옮겨놓은 조선 왕실의 태실. 마치 공동묘지처럼 만들어 버렸다 ⓒ 국가유산청
이렇듯 조선 왕실 아기씨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복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했던 태항아리와 태실에는 '생명존중'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가 담겨있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유산이다. 또 한편으로는 전국의 명당에 자리한 조선의 정기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헤쳐지고 한 곳에 묻히는 서글픈 수난의 역사도 함께 담겨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매거진 <대동문화> 151호(2025년 11월, 12월)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