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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는 1980년 5.18 당시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이다. 김창수는 그때 광주상고 옆에 있는 동신고 1학년이었다. 사진은 2024녀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광주 망월동묘역 문재학의 묘에 참배하는 모습.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 동호는 1980년 5.18 당시 광주상고 1학년 문재학이다. 김창수는 그때 광주상고 옆에 있는 동신고 1학년이었다. 사진은 2024녀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광주 망월동묘역 문재학의 묘에 참배하는 모습. ⓒ 김창수

1980년대 자주·통일운동 세대 가운데 김창수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처럼 제도권의 정점까지 올라간 인물은 드물다. 재야 평화통일운동가로 출발해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행정관과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지낸 그는 '운동과 정책'을 실무로 이어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김창수는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상무대 체육관에 쌓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보며 그는 "세상이 이렇게 비극적인 일을 겪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서울로 올라가 데모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품었고, 대학 진학 후 곧장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면 민주주의 발전도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 반미 직접 투쟁보다는 대중운동이 현실적이라는 방침을 세웠다.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가 이적단체로 규정되자, 그는 자연스럽게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그의 행로는 통일운동사의 궤적과 거의 겹쳐진다. 평화연구소(소장 조성우)와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 청와대 NSC, 민주평통 사무처장으로 이어지는 이력은 '운동이 정책으로 변모한 과정'을 압축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둔 지금, 김창수는 다시 한반도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본다. 판문점 선언과 평양공동선언이 남긴 흔적 그리고 그 이후 멈춰 선 대화의 공백을 짚으며 그는 "이제 필요한 것은 회담의 재개가 아니라 신뢰의 재건"이라고 말한다. 지난 21일 통일전망대에서 한 이번 인터뷰는 그가 바라보는 새로운 남북관계의 가능성과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1998년 7월 3일 북한에 보낼 비료 1,000톤을 선박에 싣고 있다.
1998년 7월 3일 북한에 보낼 비료 1,000톤을 선박에 싣고 있다. ⓒ 국제옥수수재단

민화협 시절 "국보법 전력자의 첫 합법 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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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화협 시절은 운동에서 행정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해당합니다. 당시 주요 경험을 말씀해 주세요.

1998년 민화협이 만들어지고 정책실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남북 간의 비료 지원이 본격화 때였어요. 전국에서 모금한 비료를 배에 실어 여수에서 남포로 보냈고 제가 그 배에 직접 탔습니다. 3박 4일 일정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는 사람이 합법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첫 사례였습니다. 통일부에서는 '보냈다가 귀국하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했다는데 담당 사무관이 '그럴 사람 아니다'고 직접 보고서를 써서 승인을 받아줬습니다.

도착한 남포항의 숙소는 '외국인 구락부'였는데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밤이 되니까 '통일운동 하는 사람이 여기 와서 갇혀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북측 인사들이 있는 숙소로 찾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통일의 방식과 대중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벌였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그날 밤 수첩에 적어 두었고,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귀환 후에는 '국보법 전력자가 합법적으로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습니다. 돌아보면 그 시기의 민화협 활동이 이후 청와대 통일비서관 시절보다 훨씬 실질적인 남북 교류 경험이었습니다. 민간 차원의 협력, 실무 교섭, 대북 지원 절차를 직접 겪으며 '남북 교류는 제도보다 신뢰가 먼저다'라는 걸 체감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 "전투병 파병하면 사표 내자"

― NSC 행정관으로 첫 공직을 시작합니다. 운동에서 행정으로 옮겨갔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운동과 달리 행정은 신념에 앞서 절차와 책임이 있었습니다. 간극을 가장 뚜렷하게 느낀 게 이라크 파병 문제였습니다. 당시 청와대 안에서도 젊은 참모들끼리 '전투병을 파병하면 사표를 내자'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저도 그 대화에 있었고요. 모두가 고민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전투병이 아닌 비전투병만 파병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표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은 무겁고 복잡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대학로에서 열린 '전투병 파병 반대 집회'에도 나갔습니다. 그냥 서서 사람들의 구호를 들었습니다. 안에서는 행정의 언어로 보고서를 쓰고, 밖에서는 여전히 운동의 언어로 외치는 사람들을 봤죠. 그 두 세계의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운동의 언어는 옳고 그름을 나누는 힘이 있지만, 행정의 언어는 그 옳음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야 하는 책임의 언어라는 걸요. 저는 그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배웠습니다. 신념은 그대로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과 책임의 무게가 달라질 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2000년 만수대 창작사에서. 우측부터 북 민화협 참사 이창덕, 조성우 민화협 집행위원장, 한완상 부총리, 김영성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대표, 김창수 민화협 정책실장.
2000년 만수대 창작사에서. 우측부터 북 민화협 참사 이창덕, 조성우 민화협 집행위원장, 한완상 부총리, 김영성 남북장관급회담 북측 대표, 김창수 민화협 정책실장. ⓒ 김창수

노무현 정부 포괄안보 "평화를 안보의 일부로 넣은 시기"

― 노무현 정부 시절 NSC는 어땠습니까?

이전 정부의 NSC는 군사 중심의 조직이었습니다. 안보라고 하면 군대, 전쟁, 위협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올랐죠.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그 틀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안보를 단순히 군사 문제로 보지 않고,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포함한 '포괄안보' 개념으로 확장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NSC 사무처 중심으로 위기관리 기능을 상시화했고, 이후 정권에서 '국가위기상황센터' 등으로 재편됐습니다.

또 이전의 NSC는 이름만 있었지 실질적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는데, 노무현 정부는 사무처를 정식으로 설치했습니다. 외교부, 국방부, 통일부, 국정원 사이의 협업을 조정하고, 통일부 장관이 상임위원장을 겸직하도록 했죠. 저는 그 변화를 현장에서 보며 '이제 평화가 안보의 일부로 들어왔다'라고 느꼈습니다.

"대통령님, 여섯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 청와대 NSC 행정관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가까이서 경험했을 텐데 어땠습니까?

2003년 봄 노 대통령이 첫 방미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어요. 점심 시간쯤 이종석 차장이 저를 부르더니 '대통령께 방미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 생각을 정리해 회의 때 발언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청와대의 특징 중 하나가, 저 같은 말단 행정관까지 회의에 참여시켜서 토론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종석 차장이 저더러 발언하라고 해서 말했습니다. '이번 방미에는 여섯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회의장이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제 말을 끝까지 들으셨어요. 잠시 생각하신 뒤에 '그래요, 그런 점이 있었지'라고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대통령이 듣는 사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운동권 시절의 직설적인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걸 받아주는 리더십이 있었던 거죠.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운동권 물이 안 빠졌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그때까지도 현실보다는 신념의 언어로 말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행정의 세계에서는 신념보다 책임이 앞선다는 것을요. 노무현 대통령은 저를 꾸짖지 않았어요. 다만 '이제는 대통령으로서 평화를 관리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남북정상회담 지연은 북한 홍수 때문

―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과정과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을 때 2차 북핵 위기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제기하면서 상황이 급박했죠. 2007년 6자회담에서 2·13 합의가 이루어지자 남북정상회담 이야기가 다시 나왔습니다. 원래는 8월에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북한 지역에 홍수가 나서 미뤄졌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를 '선거용'으로 규정하고 10·4 선언을 부정했지만 사실은 홍수 때문이었지요.

10월 열린 평양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합의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였습니다. 서해는 교전이 반복되던 지역이었는데, 그걸 평화와 협력의 공간으로 바꾸자는 거였죠. 저는 그 합의가 당시의 남북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대결의 구도를 풀고 평화의 구도로 옮기려 한 첫 시도였어요. 그때의 노력들이 이후 판문점 선언으로 이어졌고요."

CDM·온실가스 협력 시도, 제2의 흑금성 될 뻔

― 10·4 선언 이후에도 북측과의 접촉이 있었습니까?

"노무현 정부 말에 민주평통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입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얼마 안 돼서 북한 통전부 쪽 인사한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남북협상 때 문제 생기면 풀어주는 해결사 같은 인물이었는데 저한테도 늘 '같이 할 수 있는 사업 없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 관심 있던 CDM(청정개발체제) 온실가스 감축사업을 제안했습니다. '대동강 물이 그냥 흘러가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수문을 열고 발전기를 돌리면 돈이 된다. 온실가스 감축사업도 그런 구조'라고 말해줬습니다. 북측 실무자가 그 말을 듣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2008년 초 이명박 정부 들어서까지 직접 차 몰고 개성까지 가서 북한의 온실가스 전문가들과 만났습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에서 교육받은 인사들도 파악해서 소개했고, 결국 5단계 협의안(전문가 회의, 현장조사, 시범사업 등)까지 합의를 봤어요. 흥미로웠던 건 북한 사람들이 '평양 공기를 맑게 하는 게 목표'라며 동평양 화력발전소 개보수를 언급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6자회담과 의제 충돌을 우려해 탄광과 환경개선 사업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청와대에 보고했지만, '지난 정권 사람이 너무 나서지 마세요'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 뒤 정보기관 쪽에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서 같은 사업을 이어가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흑금성 같은 일이 될 수 있다고 봤어요. 공직에 남아 있으면 그런 제안이 반복될 것 같아서 정리하고 미국으로 나갔습니다. 결국 사업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남북이 환경 문제를 같이 다뤄본 첫 경험이었습니다. 공기와 물은 남북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느꼈어요."

 2019년 3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CIQ)에서 김창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사무처장.
2019년 3월 25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CIQ)에서 김창수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사무처장. ⓒ 김창수

서울 찍고 워싱턴, 남북 간 회담 뒤 술자리 사라져

― 문재인 정부 초기 통일부 장관 정책비서관(2017년 5월~2018년 7월)으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 남북관계는 어땠습니까?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후 6월 초 1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 참석해 민간 교류 재개를 의제로 올리려 했지만 북측은 아예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김정은의 전략은 '탑다운(top-down)'이었습니다. 서울을 거쳐 워싱턴으로 직행하겠다는 전략이었고, 민간 교류는 우선순위에서 빠졌습니다. 이후 북한은 과거 남측 민간단체(6·15남측위, 민주노총, 민화협 등)를 한 차례씩 평양으로 초청해 상징적 교류로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북미 직접 대화로 전환했습니다.

분위기도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시절에는 회담 뒤 식사나 술자리로 이어지며 인간적인 친밀감이 쌓였는데 그때는 달랐습니다. 예전처럼 비공식 접촉으로 친밀감을 쌓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북측은 철저히 성과 중심으로 움직였죠. 그 변화를 현장에서 실감했습니다."

"이르지 마십시오. 실수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개성공동연락사무소 초대 사무처장(차관급)으로 근무하셨습니다. 북한 사람들 많이 보셨을 텐데 어땠습니까?

"월요일에 출근해 금요일에 퇴근했습니다. 아마 그때는 남한에서 북한을 가장 여러 번 간 사람이었겠죠. 남북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출입국'이 아니라 '출입경(出入境)' 사무소라고 했습니다. 개성으로 갈 때는 남측 출입경 사무소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출입경 사무소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북측 관리가 우리 여직원의 나이를 물었어요. 제가 웃으면서 '몇 살쯤 돼 보이느냐'고 되물었더니, 그 사람이 '50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40인데 일러버린다 그랬더니 얼굴 빨개져서 '이르지 마십시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막 그러는 거예요. 다음날 그 여직원이 북측 관리의 어깨를 꼬집으며 '왜 그런 말 했느냐'고 하니, 그 관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쩔 줄 몰라하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은 굉장히 순박한 게 있어요."

[인터뷰②] "이재명의 '피스메이커에서 페이스메이커로' 전환, 아주 옳다"(https://omn.kr/2fs28)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남북경협뉴스에도 실립니다.


#김창수#민화협#남북공동연락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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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리의 집중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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