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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나는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기생'을 주제로 한 전시 <기생전>을 기획하고, 관련 사진과 엽서를 제공했다. 당시만 해도 '기생'이라는 단어를 전시장 제목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낯설고, 심지어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시대는 변했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기생을 단순한 향락의 상징이 아닌, 예술과 문화의 주체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다시 꺼낸 주제, <기생, K-컬처의 숨은 뿌리> 전시가 지난 18일부터 대구 동성로 스파크랜드 3층 뮤씨엄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오는 11월 2일까지 진행된다.

2005년 평창동 서울옥션 <기생전> 포스터 2005년 평창동 서울옥션 <기생전> 포스터
2005년 평창동 서울옥션 <기생전> 포스터2005년 평창동 서울옥션 <기생전> 포스터 ⓒ 서울옥션

2025년 대구 동성로 뮤씨엄에서 진행된 《기생전》 홍보 전광판 모습 2025년 대구 동성로 뮤씨엄에서 진행된 《기생전》 홍보 전광판 모습
2025년 대구 동성로 뮤씨엄에서 진행된 《기생전》 홍보 전광판 모습2025년 대구 동성로 뮤씨엄에서 진행된 《기생전》 홍보 전광판 모습 ⓒ @artindeco_koreanity

근현대 사진과 AI 작품이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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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 189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 제작된 근대 기생 사진과 엽서 163점. 둘째, 현대 AI 작가들이 재해석한 실사 이미지 40점. 셋째, AI 미디어 작가 6인의 영상 작품이다.

출품된 사진들은 모두 필자가 수십 년간 수집해온 희귀 자료로, 1000여 점이 넘는 방대한 소장품 중에서 선별했다. 구한말 사진관이 등장하면서 기생들은 근대 초상 사진의 주요 모델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의 사진들은 조선의 전통 복식과 장신구, 악기 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각 사료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기생의 이미지는 '조선의 전통과 여성미'를 상징하는 근대적 표상으로 확립되었으며, 동시에 근대 한국의 시각 문화 속에서 '관광용 오리엔탈리즘'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관기 189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기들의 단체 사진으로, 전통 무희복 차림의 모습을 담고 있다.
관기189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기들의 단체 사진으로, 전통 무희복 차림의 모습을 담고 있다. ⓒ @artindeco_koreanity

사진 속 기생들은 국가의 예인인 관기(官妓) 제도의 쇠퇴와 함께 근대 민간 예능인으로 변모해가던 여성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02년 고종이 세운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의 등장과 함께 기생들은 이 무대에서 근대 대중 예술의 주체로 섰다.

1908년 대한제국이 관기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하자, 일제는 곧바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
을 반포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를 구분했다. 국가의 예인이던 기생들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동시에 근대 예술인으로 재탄생 하는 길을 스스로 열었다.

협률사 1904년 궁내부 소속 협률사 단원의 모습과 태극기.
협률사1904년 궁내부 소속 협률사 단원의 모습과 태극기. ⓒ @artindeco_koreanity

권번과 평양기생학교, 근대 여성 예술 교육의 시작

관기 제도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것은 기생 조직이자 근대적 예술 기관인 권번(券番)이었다. 서울의 한성권번을 비롯해 평양, 대구, 전주 등지에서 운영된 권번은 기생의 등록, 교육, 공연을 관리한 일종의 예능 조합이자 예술 학교였다.

권번 기생 오산월과 김옥란
권번 기생오산월과 김옥란 ⓒ @artindeco_koreanity

1926년 설립된 평양기생학교(箕城妓生養成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여성에게 근대적 예술 교육을 제공한 기관이었다. 학생들은 조선어와 일본어, 외국 문화를 배웠고, 다양한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 시험을 통과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받아 활동할 수 있었고, 일부는 대중 가수나 무형문화재의 스승으로 이어졌다.

평양기생학교 평양기생학교의 학생들의 모습
평양기생학교평양기생학교의 학생들의 모습 ⓒ @artindeco_koreanity

이 시기 기생은 단순히 남성 사회에 종속된 향락의 존재가 아니라, 노래·춤·시·문학을 아우른 종합 예술인으로서 예술과 지성의 상징이었다. 기생은 근대 문화의 주체로 성장하며, 이름 있는 예인들이 활발히 활동해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었다. 옛 사람들이 기생을 '말을 알아듣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지성, 감성과 재능이 공존한 존재, 바로 예술로 세상을 읽은 여성들이었다.

기생 엽서 수(手)채색 기생 사진 엽서
기생 엽서수(手)채색 기생 사진 엽서 ⓒ @artindeco_koreanity

AI 아티스트의 시선, 정지된 이미지를 다시 '생명'으로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축은 AI 아티스트들이 해석한 기생의 이미지와 영상 작품이다. 100여 년 전의 사진은 오랜 세월 동안 낡은 인화지 속에 갇혀 있었지만, 20명의 AI 작가들은 그 멈춘 이미지를 불러내 시간을 해석하는 새로운 언어로 되살렸다.

"AI는 예술의 주체가 아니라, 인간 감성의 거울이다."

AI로 재구성된 이미지는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기억의 재해석이다. 영상 부문에서는 여섯 명의 AI 미디어 작가가 참여해, 정지된 사진을 움직임과 빛, 음악으로 확장했다. 기생의 시선은 화면 속에서 천천히 깨어나 관객을 응시한다. 기술이 과거를 어떻게 시간을 초월하여 다시 호흡하게 만들 수 있는가. 그 질문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기생전〉 인트로 영상 AI 기반 고해상도 이미지 복원과 영상 콜라주, 배경 확장 기법을 결합한 〈기생전〉 인트로 영상.
〈기생전〉 인트로 영상AI 기반 고해상도 이미지 복원과 영상 콜라주, 배경 확장 기법을 결합한 〈기생전〉 인트로 영상. ⓒ 미디어아티스트 이주엽(Neo303)

예술로 존재한 여성들

기생의 삶은 단순한 향락의 문화가 아니었다. 억압된 시대 속에서도 예술로 존재했던 여성들의 역사였다. 그들은 한국 예술의 초기 창작자이자, 사회의 감성을 번역한 해석자였다. 이번 전시는 그들의 예술성과 인간적 품격을 다시 비추며, 그 의미가 새롭게 조명되길 바란다.

나아가 AI 세대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이 전시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예술적 대화의 장으로 남기를 바란다. '기생'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오해와 편견의 언어가 아니라, K-컬처의 뿌리이자 한국 예술의 원형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 전시 정보

전시명: <기생, K-컬처의 숨은 뿌리>

장소: 대구 동성로 스파크랜드 3층 뮤씨엄

기간: 2025년 10월 18일 ~ 11월 2일

구성: 근대 사진 163점, AI 해석 작품 40점, 미디어 영상 6점

전시 관람은 유료다. (일반 1만 원, 청소년 7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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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기생#대구#뮤씨움#근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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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수 (habella) 내방

미술사학자이자 한국 근대 사료 수집가. 옛 사진, 고지도, 신문 등 종이 자료를 전문적으로 수집.. 한국해연구소 소장으로서, 동해 표기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고지도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동해의 국제 표준 명칭을 ‘한국해(Sea of Korea)’로 제안하고 관련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전시 기획자이자 현 갤러리 ‘북과바디(Buk & Badi)’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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