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사정이든 과거 피해자는 2023년 1월 이전에 신청하라?
일하다 직업병에 걸린 어떤 노동자가 있다. 이 사람은 직업병에 걸렸으나 당장은 확인되지 않았고 건강 이상이 확인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일반적인 병의 경우 뒤늦게 확인되더라도 산재신청에는 문제가 없다. 단지 보상 기간이 제한되거나(요양급여, 휴업급여), 장해가 확인된 후에는 5년 안에 신청해야 할 뿐이다(장해급여). 이 사실을 알게 된 피해자는 곧바로 산재신청을 하였으나 근로복지공단은 대뜸 산재신청을 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다른 병과 달리 이 병만은 신청기간을 제한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이 사연의 주인공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이 사안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특정 병에 걸린 피해자만 신청기간에서 차별하는 것이므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2023.1.12. 이전에 태어난) 자녀산재 피해자가 겪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자녀산재 피해자를 또다시 소송으로 내몰 것인가. 국회는 90일안에 자녀산재법 개정하라2025. 8. 28. 반올림은 국회 정문 앞에서 자녀산재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을 실시하였다. ⓒ 반올림
2022.1.11.에 공포된 자녀산재법은 과거 자녀산재 피해자의 산재신청 기간을 일반 노동자의 경우와는 다르게 매우 제한적으로 규정하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일반 노동자의 경우 '장해가 확인된 시점부터' 5년 안에 신청하면 되나(산재보험법 제112조), 과거 자녀산재 피해자의 경우 장해가 언제 확인되었는지와는 무관하게 신청기간이 정해져 있다.
2020년 1월 13일 이전에 태어난 자녀산재 피해자는 장해가 확인되었는지 등과는 무관하게 일괄적으로 2023.1.11.까지 신청해야만 한다. 2020.1.13. ~ 2023.1.11. 기간에 태어난 자녀산재 피해자의 경우도 장해확인시점과는 무관하게 2026.1.11.까지 신청해야만 한다(2022.1.11. 개정 산재보험법 부칙 제2조).
글로만 보면 다소 복잡한 내용이므로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1) 2018.1. 퇴사한 산재 노동자 – 2024.1. 장해 확인 – 2025.10. 장해급여 신청 가능
(장해가 확인 된 2024년부터 5년 내 신청)
2) 2018.1. 출생한 자녀산재 피해자 – 2024.1. 장해 확인 – 2025.10. 장해급여 신청 불가
(장해 확인 시점과는 무관하게 2023.1.11.까지 신청)
3) 2024.1. 출생한 자녀산재 피해자 – 2029.1. 장해 확인 – 2030.10. 장해급여 신청 가능
(장해가 확인 된 2029년부터 5년 내 신청)
1번은 일반적인 산재 노동자의 사례이다. 이 사람은 2018년에 은퇴하였지만, 장해는 은퇴 5년 뒤인 2024년에 확인되었다. 이 경우 장해급여를 신청에는 어떤 지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장해가 확인된 시점인 2024년부터 5년 안에 신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 3번 자녀산재법 시행 이후의 자녀산재 피해자 사례이다. 법 시행일(2023.1.12.) 이후에 태어난 자녀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경우와 같으므로 2029년에 장해가 확인되었다면 2034년까지 장해급여를 신청할 수 있다.
문제는 2번 자녀산재법 시행 이전의 자녀산재 피해자 사례이다. 1번 3번 사례와는 달리 이 경우는 장해가 언제 확인되었는지와는 무관하게 법 시행일(2023.1.12.) 이전에 신청을 해야 한다. 장해가 법 시행일 이후인 2024년에야 확인되었더라도 이 사람은 산재신청을 할 수 없다. 장해가 확인된 시점부터 5년 안에만 신청하면 되는 일반적인 산재 노동자(1번)나 법 시행 이후에 태어난 산재 자녀(3번)과는 달리, 법 시행 이전에 태어난 자녀산재 피해자녀는 산재신청에 엄청난 제약을 받는 것이다.

▲국회에서 법개정이 당장 안되었으니 불승인? 계엄 상황 무시한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규탄2024. 12. 26.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앞에서 "반도체 노동자 자녀 산재 불승인 규탄 기자회견"을 반올림 회원들이 주최하고 있다 ⓒ 반올림
실제 반올림 사례에서 2012년에 태어나서 2020년에 지적장애를 진단받은 자녀 'ㄱ', 2012년에 태어나서 2023년에 경계성지능장애를 진단받은 자녀 'ㄴ'은 2024년에 산재신청을 하였다. 일반적인 시효를 적용받는다면 'ㄱ'은 장애가 확인된 지 4년 내로, 'ㄴ'은 1년 내로 신청한 것이므로 산재신청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 시행일 이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두 자녀의 산재신청 기간은 무조건 2023년 1월 11일까지로 정해졌다. 두 자녀는 모두 현재까지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
자녀산재를 보호하겠다는 자녀산재법이 역설적으로 과거의 자녀산재의 시효를 대폭 축소하고 있다. 필자는 자녀산재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려운 과정들이 있었음을 잘 알기에, 자녀산재법에 대해 날선 단어들을 가능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부당하게 시효가 지나버린 과거 자녀산재 피해자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지금의 자녀산재법은 자녀산재 피해자를 실제로 보호할 의도로 만들어진 법이라고 볼 수 없다. 자녀의 건강손상에 대해 산재신청의 문이 열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성벽을 쌓아두고 아주 작은 문 하나를 만들어두었을 뿐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과거 피해자들의 불이익을 '소급효'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과거 피해자들은 원래는 적용되지도 않을 사람이었지만 1년이라도 신청기간을 부여했으니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크나큰 오해이다. 제주의료원 사건에서 대법원은 자녀산재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자녀산재는 산재에 해당한다고 판결하였다. 자녀산재법은 피해자에게 새로운 권리를 부여하는 법이 아니라 부당하게 제한되었던 기존 권리를 회복하는 법이다. 그러니 과거 자녀산재 피해자의 산재신청 기간은 다른 경우에 비해 대폭 축소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간 정당한 산재신청을 막아왔던 점을 고려하여 과거의 자녀산재 피해자들에게 더 긴 산재신청 기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자녀산재법이 시행된 후 3년 동안의 자녀산재 신청자는 10명에 불과하다. 자녀산재 피해자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을 과거 피해자의 산재신청이 가로막혀 있는 한, 이렇게 저조한 산재신청 상황을 개선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자녀산재 피해자에게 정당한 신청기간을 회복하는 자녀산재법 개정이 시급히 필요하다.

▲<자녀산재법 개정 촉구> 일인시위2025. 9월부터 반올림은 국회앞에서 "반쪽자리 자녀산재법 즉시 개정하라"는 내용의 일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 반올림
#2. 어떤 근거가 있든 간에 아버지는 안 된다?
이번엔 또 다른 노동자가 있다. 이 사람이 걸린 병은 이 사람이 하는 일로 인해 생길 수 있다고 법률에 적혀있는 병이다. 또한 연구로도 이 사람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병에 많이 걸린다고 확인된 바 있다. 이 사람이 다닌 회사도 이 병에 대한 책임을 일부 인정하고 이 병에 걸린 직원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 산재보험을 운영하는 근로복지공단도 이 사람은 이 병에 걸린 것이 업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산재보험에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떠하겠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는 자녀산재(태아산재 또는 건강손상자녀) 피해자의 실제 사연이다. 법규정, 연구결과,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의 태도 등 모든 정황은 이 피해자가 산재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피해자는 단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이유로 자녀산재에서 배제되어 있다.
아버지 자녀산재 피해자 A씨가 산재보험으로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A씨와 같이 전자산업에서 근무한 남성 근로자의 자녀에게서 선천성 기형 위험이 높아진다는 점은 이미 연구로 확인된 사실이다(근로자 생식보건 역학연구2). A씨가 근무한 삼성디스플레이를 포함하여 국내 전자산업 3사(삼성전자/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는 생식질환과 자녀질환이 발생한 직원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두고 있는데, 어머니뿐 아니라 아버지의 경우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 또한 A씨의 자녀의 건강손상이 A씨의 업무로 인한 것임은 2024.6.21.에 이미 인정하였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A씨는 아직까지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 자녀산재법은 임신 중인 근로자, 즉 어머니가 유해요인에 노출된 경우만 적용되기 때문이다(산재보험법 제91조의12). 수많은 근거에도 불구하고 A씨는 단지 어머니만을 적용대상으로 규정한 자녀산재법 때문에 산재보험에서 배제되어 있다.

▲근로복지공단 앞 아버지영향 자녀산재 판정을 촉구하며 일인시위2024. 6. 21. 반도체 남성노동자의 자녀 산재 피해에 대해 산재인정 판정을 촉구하며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 반올림
아버지의 유해요인 노출로도 자녀의 건강손상이 초래될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아버지가 배제된 현 자녀산재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다. 2024년 10월 국회 환경노동위 국정감사 당시, 김주영 의원이 "업무상 질병이 맞다면 산재 승인도 이뤄져야 하는데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업무상 유해 요인이란 이유로 태아 산재가 불승인됐다"며 "입법 미비가 아니냐"고 질의하자, 박종길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한 바 있다. 현재 자녀산재법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은 오롯이 국회의 의지에 달려있다.
A씨는 현재 4년 전인 2021년 12월에 산재신청을 하였으나 지금까지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재심사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 문제는 자녀산재법이 개정되어야 끝나는 문제이다. 법개정의 필요성은 차고 넘치는데 도대체 왜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작년의 경우 계엄으로 인해 정상적인 입법활동이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올해의 경우 핑계로 내세울 이유가 없다. 아버지 자녀산재를 포함하는 자녀산재법 개정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근로복지공단을 포함하여 모두가 인정하고 있지만 자녀산재법만이 인정하지 않는 자녀산재 피해자의 사연을 국회가 눈여겨 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반올림 활동가 조승규 노무사가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