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앞두고 경주는 전통과 첨단이 교차하는 야간 예술의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신라의 서사와 공간적 기억 위에 현대의 기술과 감각을 덧입혀 '빛'이라는 언어로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쓰려는 실험이다. 경주의 밤하늘은 이제 단순한 조명 연출을 넘어 시간과 예술, 기술이 교차하는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가 되고 있다.
지난 15일 경주 보문단지에서 작가 한원석은 2025개의 폐 파이프를 활용한 대형 설치작품으로 '순환과 회복, 화합'을 주제로 한 <환영>을 선보였다. 지난 16일 그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빛이 닿고 소리가 스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그림자"

▲경주 보문단지에서 선보인 환영(Void Circle)"폐 파이프를 켜낸 2025개의 고리는 순환과 회복 그리고 연결을 상징한다. 비어 있는 원은 우리의 무한한 가능성과 서로에 대한 포용을 의미한다. 고리의 물질성과 그림자의 비물질성이 교차하는 조각 너머로 경주의 자랑스러운 유물 성덕대왕 신종의 실루엣이 드러날 때 비로소 울려 퍼지는 소리 조각, 공명을 통해 한국적 여백의 미를 듣길 바란다" - 한원석 작가의 말 ⓒ 한원석
"버려진 재료가 다시 모여 물방울처럼 커지며 종의 형상을 이루고, 그 조형물은 소리와 빛을 조각하는 하나의 매개로 작동합니다."
그의 말처럼, 이번 작품은 경주의 상징인 성덕대왕신종의 울림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다.
"성덕대왕신종의 울림은 경주가 품은 시간의 숨결입니다. 그 종의 그림자를 현대적 재료와 감각으로 구현하며, 과거의 공명을 현재의 빛으로 다시 울리고 싶었습니다."
한 작가는 이번 설치와 '미디어 아트 & 빛 광장'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빛과 소리를 매개로 한 감각의 확장은 도시의 기억을 예술로 환기하는 공공성의 실험입니다. 기술은 사람과 공간을 잇는 또 다른 언어죠."
그가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지점은 명확하다.
"형태가 아니라, 형태가 사라지는 그 순간입니다. 빛이 닿고 소리가 스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그림자 속에서 관객은 '보이지 않는 형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2년 전 런던에서 돌아온 이후, 한원석 작가는 건축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영국에서는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며 "귀국 후에는 건축과 작품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설치미술은 조각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조형하는 예술이다.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올려 새로운 예술로 만든 것처럼, 저는 건물의 공간을 작품으로 만드는 개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서울 금호동의 알베르 전시관은 그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다. 1980년대 건물을 개조한 이 전시관은 중앙이 뚫린 구조로, 바람과 소리가 통하며 건물 전체가 하나의 파이프이자 조각물처럼 작동한다. 그는 "그 비움 자체가 예술이며, 건물 전체가 '소리의 조각'으로 기능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경계에서 태어나는 예술
한원석은 자신을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이달 17일부터 부산 동래공장에서 열리는 전시 <지각의 경계 : 검은 구멍 속 사유>는 그 사유의 확장선에 있다.
"과거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제는 그 경계 자체가 융합과 확장의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공간에는 새소리와 붉은 빛이 공존한다. 그는 이를 "원초적 감각으로의 회귀"라고 말하며 "<RE : birth>, <RE : relationship> 시리즈처럼 '다시 태어남'의 감각을 통해 예술과 건축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순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감각의 통합입니다. 한국적 미디어아트는 버려진 것에서 다시 태어나는 울림, 즉 시간과 재료, 감각이 함께 공명하는 지점에 있다고 봅니다."
그의 말처럼, 경주의 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간의 울림'을 품은 예술이다. 버려진 파이프가 종이 되고, 그림자가 빛을 품는 순간. 경주는 지금, 과거의 울림과 미래의 빛이 교차하는 도시로 다시 깨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