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는 '산재와의 전쟁' 선포 이후 산재 사망 감소와 '업무상 질병 처리 기간 단축'에 집중했다. 반가운 일이다. 지속적인 점검·보완으로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신속한 승인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처리기간 단축으로 '신속성'만 강조하면 '신속한 불승인'이라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 근로복지공단의 부실한 재해 조사와 졸속 판정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정상화하기 위한 '조사·판정구조 혁신'도 추진돼야 한다.
삼성전자 사망 사건을 통해 본 근로복지공단의 문제점
필자가 최근에 경험한 사례로 예를 들어보겠다. 근로복지공단은 최근 삼성전자에서 2001년부터 엔지니어로 일하다 2014년 혈소판감소증을 시작으로 무형성 빈혈과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을 잇달아 진단 받고 투병 중 2024년 사망한 노동자의 산재 사건을 불승인했다. 2014년 혈소판감소증 진단일을 기준으로 그 전에 여러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 있는 '클린룸 출입기간'이 약 1년 여로 비교적 짧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생산라인인 클린룸은 벤젠, 포름알데히드, 비소 등 발암물질이 발생한다.)

▲업무상질병판정서 주요 판정결과 갈무리삼성반도체, 디스플레이 라인에서 소프트웨어 설치 및 유지보수 업무를 장기간 해온 노동자가 혈액질환 사망한 사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가 불승인 처분을 하였다. ⓒ 김민호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클린룸 출입기간'을 1년 이라고 한 판단은 부실조사로 인한 사실 왜곡이다. 사망한 노동자는 삼성전자에서 23년 넘게 소프트웨어 개발엔지니어 등으로 일했는데, 연구소에 재직한 13년 동안 아산공장 LCD, OLED 신규 생산라인(클린룸) 셋업 기간에 각종 소프트웨어 셋업을 위해 수시로 라인에 파견·출장을 나가 일했다. 2014년 화성공장 전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전자는 사망한 노동자의 파견·출장기록과 클린룸 출입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클린룸 출입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았다. 유족은 아산공장(OLED) 신규 생산라인 셋업기간(약 1년)에 클린룸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의 진술서를 제출했다.
다른 기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불이익을 우려해서 나서지 못했지만, 진술해준 동료에 따르면, 연구소 소속 소프트웨어 개발엔지니어도 공장에 신규라인이 설치되면 셋업기간 및 안정화 기간에 파견·출장 형태로 클린룸에서 일하고, 공장 기숙사에는 연구소용 방까지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노출기간을 1년이라 함은 부당한 사실 왜곡이다.
설령 노출기간이 최소 1년이라고 하더라도 혈액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 공단이 만든 '직업성 암 재해조사 및 판단요령'이라는 업무 메뉴얼에도 발암물질 첫 노출부터 암 발생까지의 잠복기에 대해 "조혈계 암은 1년 이내도 가능"하다고 되어있는데 이마저도 무시하였다.
심지어 어떤 판정의원은 '삼성 근무기간이 8년 11개월로 짧다'면서 불인정하였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망한 노동자는 23년 넘게 근무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사망한 노동자의 유해물질 노출기간에 대한 유족의 주장에 대해서도 잘못 기재했다. 잘못 기재된 내용은 판정위에서 바로잡히지 않고 심의안, 심의조서 및 판정서에 그대로 옮겨졌다. 이런 오류가 발생하게 된 이유에 대해 알 수는 없지만, 발병 과정에 대한 유족 측의 주장과 근거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거나 오해한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판정위원회는 불승인 근거로 "객관적 자료에서 노출수준을 확인할 수 없다", "담당직무가 소프트웨어 개발이다" 등 이유도 들었는데, 객관적인 자료 확인이 안 되는 것은 회사의 책임인데다, 소프트웨어 개발업무라도 일한 공간이 클린룸이라면 유해물질 영향이 미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법원은 공단의 부실한 재해조사나 사업주의 조력의무 해태·은폐 등 노동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인해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사정은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객관적 자료에서 노출 수준을 확인할 수 없다'는 불인정 이유 또한 적절하지 않다. 왜냐면 '기존에 조사되었던 반도체 공정엔지니어 등의 업무형태를 참고하여 판정위에서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공단 본부의 자문 결과와 동일사업장 공정엔지니어에게 발생한 동일상병 인정사례 및 셋업기간은 평소보다 노출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 판정위원별 의견 중 일부삼성전자 혈액암 사망사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판정위원회는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부당한 판정을 내렸다. ⓒ 김민호
부실한 재해조사와 졸속 판정... 묵인·
방조한 노동부와 공단도 책임 있어
노동자 주장과 사업주 의견이 불일치하거나 노동자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인해 객관적인 근거가 남아있지 않는 경우는 흔하다. 그런데 노동부와 공단에는 이런 경우를 대비한 조사 매뉴얼이나 지침이 없다. 노동자에게 사업주 의견을 전달하고 반론권을 보장하는 규정도, 추가 조사(현장조사, 동료 작업자 조사, 관련 문헌 및 사례 조사 등)를 실시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
공단의 재해조사는 사업주 의견 위주로 사실관계를 정리하거나 서로 다른 주장을 단순 나열할 뿐, 사실관계에 대한 당사자의 주장을 비교하고 쟁점에 대한 추가 조사를 하지 않는다. 법령상 인정기준만 나열할 뿐, 쟁점에 관한 법원 판례와 공단 지침을 조사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태로 판정위에 심의를 의뢰하는 것이다.
판정위의 '과도한 심의건수'(하루 10~20건)와 '법리에 따른 규범적 판정이 불가능한 판정구조'도 문제다. 판정위, 심사위원회, 재심사위원회 위원들 중 '법률전문가'는 약 20% 수준이고 약 70%는 의사다. 법리에 근거한 규범적 판정을 기대하기 힘들다.
'비밀주의'도 문제다. 사건을 심리하는 위원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는다. 판정서에 위원 이름도 적지 않는다(재심사위원회만 기재). 비밀주의는 위원들의 '책임감 결여'와 '부실한 심리'로 이어지기 쉽다.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반올림이 근로복지공단앞에서 "계속되는 죽음과 고통, 근로복지공단은 판례대로 신속히 인정하라"는 취지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반올림
부실한 재해조사와 졸속 판정을 방지하기 위한 '혁신 방안' 필요해
노동자는 산재법상 입증책임 부담자다. 사업주 의견을 노동자에게 전달하고 '반론권'을 보장해야 한다.
공단에 재해조사 권한을 부여하고 노동위원회 심판사건 조사에 준하는 수준으로 개선해야 한다.
과거 노동부(산재보험과)가 산재보험 업무를 처리했을 때는 감독관 권한으로 사업주를 상대로 실효성 있는 재해조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노동부가 공단에 산재보험 업무를 위탁하면서 재해조사 권한은 부여하지 않았다. 실효성 있는 재해조사를 위해서는 공단에 (노동부와 연계하거나 독립적인) 재해조사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재해조사서의 '필수' 기재사항으로, 사건의 쟁점(예 : 유해요인 취급 및 노출 여부, 노출량(기간, 시간, 측정, 농도 등) 등), 쟁점별 주요 사실관계 대조표(예 : 노출시간(업무시간) 등에 대한 당사자 주장 및 판단 근거(예 : 대법 판례, 관련 지침 및 인정사례 등)를 포함시켜야 한다.
위원회 위원 구성도 '법률전문가' 위주로 정상화해야 한다. 심의 건수를 줄이고 심의 시간을 늘려야 한다. 노동위원회 심판사건처럼 하나의 심의위원회에서 하루 5건 이내, 1건당 최소 1시간 이상 심리해야 한다. 당연인정기준을 확대하여 심의 건수도 줄여야 한다.
재해조사 단계에서 지침상 인정기준이 충족된 사건, 동일사업장에서 승인된 사건 및 동일 업종·직종에서 다수 승인된 사건과 사안이 동일·유사한 사건은 심의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타당하다. 상임위원도 확대해야 한다. 이러한 방안이 현실화되면, 심의회의별 위원을 현재의 7명(판정위, 심사위), 9명(재심사위)에서 '절반 수준'으로 줄이는 대신 2~3개의 심의회의를 동시 개최하여 충분한 심리 시간 확보도 가능하다.
위원회의 '투명성'도 확보해야 한다. 위원 명단을 사전에 공개해서 내란혐의자들도 행사하는 '기피신청권'을 노동자에게 보장해야 한다. 판정서에 위원 이름도 적어야 한다. 심리 과정에서 법리와 지침에 어긋나는 태도를 보이는 위원에 대한 위원장의 책무를 명문화하고, 불인정된 사건은 불복 절차를 통해 인정됐는지 추적 조사하여 판정에 관여한 위원들을 재교육시키고 위원 '연임 심사' 및 '기관 평가'에 반영시켜 법리에 따라 판정하도록 간접 강제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상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수많은 재해노동자와 유족, 노동건강권단체와 노동계, 법률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노동부와 공단이 외면해 왔을 뿐이다.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재명 정부의 첫 국정감사에서 질병산재의 부실조사와 졸속판정의 문제가 심도 있게 다뤄지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반올림 지원노무사 모임의 김민호 노무사님이 작성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