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SKT 아이폰17 프로 텔레비전 광고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불과 3초 남짓한 장면이었지만, 그 안에는 전통의 온기와 손끝의 떨림이 있었다. 그 붓을 쥔 사람, 바로 혁필화 작가 유채혁필(본명 서동진)이다. ⓒ SKT
"오랫동안 예술인을 지원하는 일을 하면서도, 가슴 속에 간직했던 꿈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예술을 마음껏 하며 살고 싶습니다."
스무 해 가까운 시간을 공공기관에서 예술인을 지원하는 일에 헌신해온 그는 지난해 조용히 그 자리를 내려놓았다. 행정의 언어에서 예술의 언어로, 보고서의 문장에서 붓의 필선으로, 그는 그렇게 '남을 위한 예술'에서 '자신의 예술'로 방향을 틀었다. 서류 대신 붓을, 인감 대신 가죽을 손에 쥔 순간,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 위로 접어들었다.
가죽 붓이 종이 위를 스친다. 단청안료의 색이 번지고, 곡선이 얽히며 한 글자가 한 폭의 그림으로 피어난다. 그 붓끝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숨소리 같고, 맥박 같다. 최근 SKT 아이폰17 프로 텔레비전 광고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글씨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불과 3초 남짓한 장면이었지만, 그 안에는 전통의 온기와 손끝의 떨림이 있었다. 그 붓을 쥔 사람, 바로 혁필화 작가 유채혁필(본명 서동진)이다. 그를 지난 11일에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예술지원 기관에서 '예술을 돕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직접 '예술가'가 되었다. "혁필화는 글씨이자 그림이고, 상징이자 기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단했다. 혁필화는 붓 대신 가죽을 다듬어 만든 도구로 글자를 '그리는' 예술이다. 조선 후기 장터에서 가훈이나 덕담을 써주던 장돌뱅이들의 거리예술로 시작해, 민화의 한 갈래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혁필화를 글씨가 아니라 그림으로 분류합니다. 그래서 저는 혁필로 이름을 '쓴다'가 아니라 '그린다'고 말합니다. 겉보기엔 가죽 붓이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종이를 문지르고 긁어내며 완성되죠."
그는 과거 국내 거리예술의 발전방향에 대한 논문을 쓰며 혁필화를 접했다. 혁필화라는 장르는 그에게 학문이었고, 이후 삶의 길이 되었다. 몇 년 뒤 국내 원로 작가 세 분에게 혁필화를 사사받으며 전통기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두 편의 논문을 통해 혁필화의 학문적 토대를 세웠다.
"저는 창작과 연구, 발표, 그리고 홍보를 균형 있게 병행해왔습니다. 앞으로도 혁필화의 기법과 발전 방향을 고민하는 화가이자 연구자로 남고 싶습니다."

▲유채혁필(본명 서동진) ⓒ 유채혁필
장터의 붓이 도시의 브랜드로 변하다
그가 사용하는 도구는 모필이 아니라 가죽붓이다.
"'혁(革)'은 가죽을 뜻하지만, 작가마다 재료는 다양합니다. 가죽뿐 아니라 압축 양모나 인조가죽, 천 조각을 쓰기도 하죠. 양모는 부드럽지만 탄성이 약하고, 가죽은 마찰이 커서 선과 면의 생동감이 살아납니다. 저는 그 감각을 사랑합니다." 손잡이는 나무나 쇠로 만든다. "나무는 종이의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지고, 쇠는 무게감이 주는 집중력이 있습니다. 가죽 붓과 손 끝이 하나가 되어 문자를 새긴다는 마음으로 그립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글씨가 아니다.
"모필이 '선의 예술'이라면, 가죽붓은 '면의 예술'입니다. 두꺼운 가죽으로 한 획에 외곽선과 색면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어 신속하고 간결합니다. 단청안료의 원색이 민화적 상징과 만나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힘을 내죠. 획이면서 색면이고, 문자이면서 그림이며, 상징이 결합된 조형적 정체성, 그것이 혁필화의 미감입니다."
오는 11월 4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용산구 용문시장 안의 '윤성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장터에서 브랜드로, 혁필화의 재탄생>은 그가 걸어온 여정의 중간 보고다.
"혁필화는 본래 장터에서 즉석으로 그리던 거리예술입니다. 손님이 문구를 정하면 작가는 그 사람의 성격과 취향을 그림에 담았죠. 저는 그 정신을 이어가되, 작품으로서의 완성도와 가독성을 우선합니다."
그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장터에서 브랜드로'라 붙였다. 장터의 손글씨가 도시의 로고로, 한 줄의 축원이 하나의 브랜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전시장 자체가 용문시장 안에 있다는 것도 상징적으로 어울립니다. 지금의 혁필화는 문자와 색, 상징이 결합된 시각예술로서 충분히 브랜드 가치를 지닌 장르입니다. 한글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높아진 지금, 혁필화는 한국의 대표 문화상품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의 붓은 이미 무대와 광고, 브랜드의 세계로 나아갔다.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전우치〉의 포스터 제목 글씨, SK텔레콤 광고 속 '대한민국', 그리고 올해 보그 잡지 3월호와 9월호에서 컨트리뷰터로서 혁필 작업 참여까지. 전통의 손끝에서 시작된 혁필화는 오늘의 시각언어로 살아 숨쉰다.
"혁필화가 갤러리에 들어온다는 건 단순한 변화가 아닙니다. 과거 속화로 여겨지던 형식이 이제 예술작품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지요. 즉흥성과 관객과의 소통, 그 관계적 미학이 혁필화의 본질입니다."

▲보그 잡지에서 두차례 컨트리뷰터로서 참여한 혁필 ⓒ 유채혁필
불완전함 속의 아름다움, 손의 예술
그의 작품은 색의 언어로도 이야기한다.
"저는 오방색을 주로 씁니다. 오방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생명력과 조화를 상징하는 색이죠. 서로 다른 색이 한 글자 안에서 섞이고 번질 때, 강한 색이 서로를 상쇄해 부드럽게 어우러집니다. 그 순간 생명감이 피어납니다."
AI가 이미지를 완벽히 재현하는 시대에, 그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손의 떨림을 예술로 믿는다.
"AI는 완벽하지만 인간의 흔적은 없습니다. 혁필화는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획의 겹침, 색의 번짐, 손의 떨림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가 됩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될수록 사람들은 손맛과 유일성을 더 갈망합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음식이 아니라, 나에게 꼭 맞게 요리된 건강식 같은 예술이 바로 혁필화입니다."
그는 배움의 순간을 소중히 여긴다.
"저는 당시 칠순 넘은 선생님(정홍주, 남상준, 황정진) 세 분께 배웠습니다. 배운 기법과 철학을 비교하며 공통된 본질을 찾는 과정이 제 연구의 출발점이었어요. 예전에는 저도 제자들에게 전수를 했지만, 지금은 시연이나 공개 강연 중심으로 활동하며 재료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량이 더 무르익으면 강의했던 교재를 정리해 후학에게 전할 생각입니다."
민화작가 서동진에게 혁필화는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삶의 태도다.
"문자가 지닌 힘 덕분에 저는 혁필화를 그릴 때마다 서예의 고요함과 드로잉의 자유로움을 함께 느낍니다. 손님을 위해 좋은 상징을 넣어 작품을 그리면 자연스럽게 그분의 건강과 행복을 빌게 되죠. 이것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그림과 문자를 통해 나누는 '행복 기원'입니다. 색과 상징, 자연의 기운을 믿는 마음이 심리적 안정과 긍정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혁필화는 '행복을 부르는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혁필화에는 행복과 건강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각자 자신만의 상징과 의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그의 붓끝에서 다시 살아난 전통, 그리고 그 전통이 도시의 브랜드로 피어나는 장면은 오늘날 한국 예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장터의 예술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손끝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모든 시간이 새겨져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장터에서 브랜드로, 혁필화의 재탄생>
2025.11.04(화)~11.16(일)
Performance & Art 갤러리 윤성은 (서울 용산구 새창로14길 45)
작가와의 대화 및 프레스: 11.08(토)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