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0일,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한 종의 멸종을 공식 선언했다. 유럽 본토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에 걸쳐 광범위하게 번식하고 이동하던 조류, 흰배중부리도요(Numenius tenuirostris)였다. 인류는 30년 만에 이 새가 더 이상 지구 위에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이 새가 목격된 것은 1995년 2월 25일 모로코의 메르자 제르가였다.
그 후 수많은 탐조가와 조류학자들이 유럽과 러시아의 습지, 그리고 지중해 연안의 월동지를 찾아 나섰지만, 단 한 마리도 다시 발견되지 않았다. 30년의 공백 끝에 인류는 이 새가 되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흰배중부리도요의 사라짐을 처음 공식화한 곳은 IUCN이 아니었다. 2024년 11월, 영국왕립조류보호협회(RSBP)는 자체 검토 결과를 통해 이미 "사실상 멸종(extinct in the wild)"을 선언한 바 있다.

▲Naturalis Biodiversity Center 의 흰배중부리도요 표본 ⓒ 위키피디아 화면갈무리
두 기관의 시점 차이는 단순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멸종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의 간극을 보여준다. RSBP의 선언은 "존재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현실을 인정하자"는 냉철한 판단이었다면, IUCN의 공식 발표는 "모든 가능성을 다 찾아본 뒤 남기는 생태적 사망진단서"에 가깝다. 이 두 선언 사이에는 과학의 엄밀함과 인간의 정서가 부딪히는 미묘한 경계가 존재한다. 멸종을 선언하는 행위는 과학적 판단임과 동시에 인간의 양심이 남기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새가 있다. 원앙사촌은 오래전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너무나 오래전 이야기라, 내게는 먼 옛날의 전설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영국왕립조류보호협회의 멸종발표와 올해 다시 확인된 선언은 지금 우리의 세대가 목격한 현실의 일이다. 살아 있는 동안 사라진 새라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되살린 생명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한 새
필자는 멸종보다는 오히려 그동안 복원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으며 희망을 보았다. 예산 황새마을의 황새 복원, 창녕 따오기 방사처럼 한때 사라졌던 생명들이 되돌아오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황새복원센터에서 길러진 황새가 야생에서 번식에 성공하고, 이제는 하늘을 나는 황새를 마을 근처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창녕의 따오기 또한 중국에서 선물받은 개체에서 시작해 인공번식에 성공했고, 야생 방사 이후 번식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멸종 위기를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흰배중부리도요의 소식은 그 믿음의 근본을 흔들었다. 복원할 개체가 없고, 서식지가 파괴되었으며, 기억조차 희미해진 존재 앞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흰배중부리도요는 북위 50도 이상 지역의 습지에서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번식기가 되면 4개 정도의 알을 낳지만, 남겨진 기록이 너무 적어 번식 생태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유럽과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에서 관찰 소식이 몇 차례 있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 새는 유럽에서 거의 50년 만에 추가로 멸종된 조류로 기록되었다. 사냥, 농경지 확장, 연안 습지의 오염, 기후변화가 겹친 결과였다.
먹이를 찾을 땅은 줄었고, 이동의 길은 막혔으며, 월동지는 인간의 개발로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결국 이 새는 인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구도 총을 쏘지 않았지만, 모두가 서식지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이 멸종은 문명 전체의 결과다. 흰배중부리도요의 멸종은 단순히 한 종의 소멸이 아니라, 도도새 이후 인류가 다시금 마주한 윤리적 질문이다.
17세기 모리셔스섬의 도도새는 인간이 야생에서 멸종시킨 최초의 조류였다. 총과 돼지, 원숭이, 개 쥐, 그리고 인간이 함께 상륙한 순간부터 도도새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그저 "맛없는 새가 하나 사라졌다"고만 했다. 도도새의 사라짐은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이 불러온 멸종을 자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DNA 분석기와 위성 추적기를 갖고도 여전히 멸종을 막지 못하고 있다.
조용한 멸종, 모두가 공범이다
심지어 이제 멸종은 뉴스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인류는 '멸종'을 너무 자주 듣게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다. 멸종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 흰배중부리도요는 그 '무감각'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도도새의 멸종이 식민지 확장의 그림자에서 벌어졌다면, 흰배중부리도요의 사라짐은 세계화와 기후위기의 그늘 아래서 일어났다. 둘 사이의 400년은 기술의 진보였지만, 생명에 대한 윤리는 그만큼 진보하지 못했다.
우리는 여전히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식지를 파괴하고, 기후위기를 외면한 채 에너지 소비를 늘려가고 있다. 멸종의 원인을 안다면서도, 그 원인을 멈추지 못하는 문명은 이미 자신이 부르는 재앙의 길 위에 서 있다. 10월 10일 세계철새의 날을 맞아 흰배중부리도요의 멸종을 애도하는 이유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철새는 국경을 넘는 존재이며, 인류가 자연과 맺는 관계의 상징이다. 그들의 이동길은 지구 생태계의 순환을 보여주는 지도와 같다. 그 길이 끊어지는 것은 곧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흰배중부리도요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한 지역의 손실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경고다. 이제 더 이상 멸종은 '타자의 일'이 아니다. 서식지를 잃는 새는 결국 인간의 미래를 비추는 그림자다.
멸종을 인문학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윤리적 실패라고 필자는 규정하고 싶다. 멸종은 인간이 타자를 어떻게 대했는가의 결과이며, 공존의 상상력을 잃은 사회의 초상이다.
멸종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오늘, 우리는 기술과 자본으로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상 스스로의 생존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기후위기와 생태 붕괴, 전쟁과 불평등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다른 생명과의 관계를 단절한 문명, 그것이 바로 멸종의 또 다른 이름이다.
멸종이 일상이 된 사회
이제 우리는 흰배중부리도요를 사진이나 영상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 왕립조류보호협회는 마지막으로 촬영된 영상을 공개하며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새"라고 말했다. 다음은 누구의 차례일까? 멸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물음 앞에서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흰배중부리도요 짧은 안에는 300만 년의 진화와 30년의 기다림, 그리고 인간 문명의 무관심이 함께 담겨 있다. 인간의 진화만을 위한 시대적 페러다임이 바뀌지 않는다면, 흰배중부리도요와 같은 멸종소식은 더 짧고 자주 듣게될 것이며, 무뎌질 것이다. 남은 것은 기록과 기억뿐일 수 밖에 없다.
이런 기록들은 필자에게는 슬픔이고 책임이다. 멸종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과학과 기술 개발이 아니라 윤리의 회복이다. 흰배중부리도요가 사라진 자리는 멸종된 생명들의 자리는 생태계의 공백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공백으로 이어질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흰배중부리도요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지만, 그 새의 침묵은 여전히 지구의 소리로 남아 있다. 멸종을 애도하는 것은 단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최초로 인류가 멸종시킨 동물 도도새 이후, 대륙에서 멸종이 된 흰배중부리도요 이후에도 우리가 바꾸지 못한다면 미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멸종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직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