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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질병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 참사는 단순한 환경 사고를 넘어 '국가 시스템 실패'의 상징으로 남았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배보상, 재발 방지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앞에는 늘 환경산업기술원이라는 벽이 놓여 있다.

피해자들이 '무용하다'고 말하는 이 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존재 자체가 의심받고 있는가. 최근 진행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과 환경산업기술원 담당자들과의 대화를 보면, 피해자들의 분노와 절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10월 2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환경부와 환경산업기술원의 주도로 구성하고 있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보상을 위한 협의체 구성이 늦어지는 것에 항의 시위를 벌였다. 피해자들은 광화문에서 피켓시위를 가진 뒤, 환경산업기술원이 있는 불광동으로 이동해 환경산업기술원 책임연구원과 만나 협의체 구성이 지연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인데, 또 기다리랍니다"

 지난 10월 2일 광화문 앞에서 벌인 가습기살균제 피해 해결을 위한 피켓시위를 벌이는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지난 10월 2일 광화문 앞에서 벌인 가습기살균제 피해 해결을 위한 피켓시위를 벌이는 피해자들과 시민단체 ⓒ 파이팅챈스

간담회에서 김태윤 피해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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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하루하루 버티는 중증 피해자들이 여기까지 와서 말하면 뭐합니까. 듣는 척만 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잖아요."

그의 말처럼, 피해자들은 지난 수년간 수없이 간담회에 참석했고, 의견을 제출했고, 개선을 촉구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검토하겠다"는 말뿐인 무책임한 답변, 정권 탓·장관 탓을 하며 공을 돌리는 태도, 진행 상황조차 알리지 않는 불투명한 소통….

"다른 참사는 TF를 꾸리고 정부가 직접 나섭니다. 왜 가습기살균제만 이런 취급을 받습니까?"

피해자들의 울분이 쏟아졌다.

가장 큰 문제는 행정절차에 대한 불투명성이다. 피해자 단체들은 수차례 "협의체 구성과 합의안 마련"을 약속받았으나, 몇 달이 지나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대표를 뽑고, 협의체를 꾸리고, 합의를 도출하겠다던 절차는 어디로 갔습니까. 왜 아무도 진행 상황을 알려주지 않습니까?"

피해자들의 질문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특히 구제기금의 집행 내역과 잔액, 전용 여부 등에 대한 투명한 공개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구제기금을 뜯어보면 걸릴 게 많을 것"이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2022년 감사원 감사에서도 자금 운용과 관련한 지적이 있었지만, 구체적 후속 조치나 책임자 처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결정권 없다"는 말의 반복... 피해자 "왜 존재하는 기관입니까?"

간담회 내내 환경산업기술원 관계자들의 입에서 반복된 말은 "결정권이 없다"였다.

"저희는 전달만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위에 보고드릴 수는 있지만,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닙니다."

피해자들은 분노했다.

"결정권도 없고 책임도 없으면 도대체 왜 존재하는 기관입니까? 피해자 대응이 그렇게 어렵다면 차라리 독립 재단을 만드는 게 낫겠습니다."

결국 환경산업기술원은 "우리는 집행 기관일 뿐, 정책과 예산 결정은 환경부 몫"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보는 현실은 다르다.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대응하고 소통하는 기관이 환경산업기술원이고, 이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월2일 환경산업기술원 담당자와 면담하고 있는 피해자들.
10월2일 환경산업기술원 담당자와 면담하고 있는 피해자들. ⓒ 파이팅챈스

이 문제의 뿌리는 제도 설계 자체에도 있다. 피해자 구제와 관련된 예산, 행정, 의사결정이 각각 환경부, 기술원, 기업, 협의체 등으로 흩어져 있어 효율적인 대응이 불가능한 구조다. 답답해하던 김태윤 피해자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따로따로 움직이는 곳은 없습니다. 예산, 행정, 결정이 한 군데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 분산 구조'는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시스템을 만든다. 피해자들은 환경부에 가면 "기술원 소관"이라는 답을 듣고, 기술원에 가면 "우리는 결정권이 없다"는 말만 듣는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가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깊어질 뿐이다.

"그 돈 다 어디로 갔습니까?"구제기금 향한 불신

피해자들의 분노에는 환경산업기술원이 초래하는 불신행정에도 이유가 있다.

"몇 억씩 들여 간담회를 하고, 용역을 주고, 연구를 한다지만, 결과가 하나도 없잖아요. 그 돈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우리 가족이 죽고 만들어진 돈입니다."

실제로 피해자 구제를 위해 조성된 기금은 수천억 원 규모지만, 그 사용 내역은 일부 포털을 통해 총액 수준만 공개될 뿐, 세부 항목이나 전용 여부, 수혜자별 현황은 알 수 없다. 이런 불투명성은 피해자들의 신뢰를 더욱 갉아먹고 있다.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기술원 무용론'이 공공연히 거론된다.

"이럴 거면 기술원이 없어도 똑같다. 아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정부가 독립된 재단을 만들고 거기서 피해자 지원과 합의를 전담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분노가 아니다. 피해자 지원의 핵심 기능이 사실상 멈춰 있고, 소통 창구로서의 역할도 실패했으며, 예산 집행의 투명성조차 담보하지 못한 기관이라면,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5가지

피해자 단체들은 다음과 같은 최소한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먼저 정보가 투명화 되어야 한다. 기금 입출, 전용 여부, 감사 후속조치를 포함한 모든 재정 자료의 공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피해자들과 환경부간의 정기 소통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피해자 대표단과의 월례 브리핑이나 행정절차에 대한 안내 문자·포털 공지 의무화가 뒤따라야 한다.

세 번째로 법적 구속력의 명시이다. 협의체 합의의 재정·행정적 구속력, 정부 승인 절차를 문서화하여 공신력을 높여야 한다.

네 번째로 피해 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 호흡기 외 전신·정신 질환까지 인정 범위가 확대되고 판정 절차가 명확화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독립 기구 설립 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과 같이 행정, 집행, 지원이 따로 움직이는 불합리한 조직이 아닌 피해자 지원·합의를 전담으로 하는 독립 재단 설립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여전히 병원 침대 위에서, 혹은 산소호흡기 옆에서, 정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행정, 깜깜이 정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구조였다.

환경산업기술원은 지금처럼 '결정권 없는 집행 기관'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 지원의 중심으로서 존재 의미를 입증하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피해자들이 외치는 "무용하다"는 말은 단지 분노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이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의 진단이다.

#파이팅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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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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