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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맹호부대 장병들의 베트남 상륙 장면이다. 사진은 밀라이 박물관에서 촬영.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맹호부대 장병들의 베트남 상륙 장면이다. 사진은 밀라이 박물관에서 촬영. ⓒ 김성헌

베트남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닮은 데가 많고 정서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이다. 고대에는 세 번에 걸친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했고, 한때 중국에 병합되었으나 독립을 회복하고, 17~18세기 시대에 남북으로 분단하여 서로 싸웠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보호국이 되었다가 맹렬한 반불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1945년 최후의 황제 바오다이를 퇴위시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1950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져 분단이 되어 싸우고,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어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에서 내전이 일어난 것은 1955년(제네바협정 성립 이듬해) 남부베트남에서는 바오타이가 퇴위하고, 고 딘 디엠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를 강력히 지원한 미국은 협정에 따른 베트남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반대했다. 이에 따라 남부베트남에 강력한 반정부세력이 대두했고 1960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성립하여 본격적인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미국은 남베트남군사정부를 지원하고 민족해방전선을 압박하기 위해서 베트남에 군사 개입을 시작했다. 1963년 고딘 디엠 정권이 붕괴된 후에도 미군의 개입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엄청난 전비와 완강한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반격으로 점차 수렁에 빠져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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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그의 과거 행적으로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해 11월 11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한다면 한국 정부는 월남(베트남)에 부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고 정규군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군을 모집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제안했다. 미국의 파병 요청이 있기 전에 자진해서 제안한 것이다.

미국의 오랜 맹방인 영국이나 캐나다를 비롯 어느 나라도 파병을 거부하면서 미국이 '외롭게' 베트남 전쟁을 치루고 있을 때 박정희의 파병제안은 그야말로 구원투수격이었다.

박정희의 파병 제안은 국무회의나 국회의 의결(당시 국회는 해산상태)이 따르지 않았다. 베트남의 역사와 세계사적인 이 전쟁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파병문제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정부는 64년 7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베트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병 동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 이때는 의료지원 등 비전투부대 파병안이다. 그러나 전투부대의 파병안은 65년 8월 13일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공화당 단독으로 처리하였다.

한국군이 처음으로 베트남전에 투입된 것은 63년 9월 11일, 남부 베트남정부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이때는 불과 130명 규모의 의무부대와 10명의 태권도 교관이 전부였다. 그후 다시 지원요청을 받아 64년 2월 14일 2천 명 규모의 비전투부대인 공병대 중심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외적으로 크게 말썽이 없었다.

2천 명 규모의 국군병력을 파병하기 위해 정부에서 제출한 동의안은 국회에서 무난히 통과되었다. 그러나 65년 6월 26일 베트남과 미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전투부대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일반국민과 학생들 사이에도 반대의견이 적지 않았고, 국회 내에서는 여야의 입장을 초월해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① 국내 문제의 심각성 : 국내 형편상 파병보다 더욱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부분이 많다. 정부당국자들이 파병을 이롭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프랑스·영국의 반응을 분석해 보라. 베트남 파병은 장작을 가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이다(홍이섭,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장).

② 국내 안보의 긴장 초래 : 국군 2,000명을 보내는 것은 적은 숫자는 아니더라도 악화된 베트남사태에서 어느 정도나 성과를 낼지 모르겠다. 우방을 돕는다는 데는 원칙적으로 찬성이지만, 우리 전선에도 긴장을 초래할 수 있다(박관숙, 연세대 교수).

③ 외교적 손해 : 6.25 때 자유우방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다는 명분에서는 이익이 있겠으나 국제적으로 청부전쟁을 한다는 인상을 받기 쉽고 외교 면에서 큰 손실을 입을 것으로 본다 (김재순, 국회의원)

④ 인명손실 : 한국사람이라고 하여 무모하게 생명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베트남 파병장병에 대한 대우문제도 애매하며 전사자나 부상자에 대한 보상도 명확하지 않다.(최치원, 의사).(주석 1)
정부는 파병의 명분으로 6·25 때 자유우방의 도움으로 공산침략을 격퇴시킨 우리가 한 우방국이 공산침략에 희생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6·25 이래의 혈맹인 미국을 도와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고 선전했다.

이와 더불어 파병에는 경제적 측면에서 한·미·월 3각협력체제가 선전되었고, 군사적 측면에서 주한미군을 빼내어 베트남에 보내겠다는 미국의 위협도 따랐다.

64년 9월 소규모 비전투부대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베트남전 개입은 73년 3월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8년 5개월 동안 지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 5차례에 걸쳐 군대가 파견되었다. 한국은 이 기간 베트남에 평균 5만 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했으며 교대근무를 통해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대의 총수는 약 32만에 달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주요부대는 65년에는 미국측의 추가파병 요청과 그에 따른 보상조치인 이른바〈브라운 각서〉를 조건으로 2만 명 규모의 백마부대가 추가파병되었다.

베트남에 추가파병은 조약상의 의무에서가 아니라, 미국측이 파병의 대가로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 공여를 약속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추가파병에 대한 보상조치로 14개항의 이른바 〈브라운 각서〉를 마련했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① 추가파병에 따른 비용은 미국정부가 부담한다 ② 한국군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사단의 장비를 현대화한다 ③ 베트남 주둔 한국군을 위한 물자 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조달한다 ④ 베트남에서 실시되는 각종 건설·구호 등 제반사업에 한국인 업자를 참여시킨다 ⑤ 미국은 한국에 추가로 AID차관과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베트남과 동남아시아로의 수출증대를 가능케 할 차관을 추가로 대여한다 ⑥ 한국이 탄약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자재를 제공한다는 등이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서 월맹군 4만 1천여 명을 사살하고 7,438㎢를 평정했으며, 참전기간 동안 국군 약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베트남전 기간 동안 노동력 진출은 65년 1백 명 미만에서 66년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급격한 증가를 보여주었다. 63년부터 70년 6월 말까지 해외취업실적 43,508명 가운데 베트남 취업이 24,294명으로, 선원을 제외한 해외취업자의 70%를 차지하고 있어 많은 고용증대를 가져왔다고 발표되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이른바 '베트남 특수'현상이 나타났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따라 얻어진 전시특수였다. 5만 5천 명 규모의 전투요원과 노무자·기술자 등 민간인 1만 6천여 명이 베트남에 파견되고, 이에 따라 군납, 파월장병 송금, 파월기술자 송금 등으로 66년에 6,949만 달러, 66~70년까지의 총액 6억 2,502만 달러 규모의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참전의 결과 총액으로 약 10억 달러의 외화를 획득하여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행에 필요한 외자를 충당하여 연평균 12%의 경제성장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 새로운 독점자본과 신흥재벌의 출현을 가져왔다. 한진그룹의 경우 66~67년의 1년간 베트남에서 71억 원을 벌어 '월남상사'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러나 미군 봉급의 3분의 1 수준인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순전히 미국측의 이해에 맞추어 추진되었고, 5천여 명의 무고한 청년의 희생을 가져왔으며, 공산국가는 물론 제3세계, 심지어 다수의 친서방 국가들로부터 '용병'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비동맹권 내에서 한국의 국제적 지위의 약화를 가져왔다.

전후에 드러난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았다. 파월장병·취업자들에 의한 '현지처'와 2세 문제를 비롯하여, 고엽제 등으로 본인들은 물론 후세들의 질환 등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또한 베트남 일부 지역에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들의 잔혹한 학살을 기록한 석비가 남아 있어, 아픈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평화민족의 전통이 국제사회로부터 '용병'이라는 부끄러운 멍에를 쓰게 된 점이다.

주석
1> <경향신문>, 1965년 1월12일치.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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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논쟁과 쟁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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