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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함월산이 흘려보낸 알천(북천)이 명활산성을 휘감아 돈다. 마립간 시대, 고구려의 간섭을 견제하고자 부득이 이 산성에 웅거해야만 했다. 불가피했으나 대대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지 마립간이 결단을 내린다. 신라의 뿌리인 월성으로 환궁이다.

삼년산성 등 나라 곳곳에 성을 쌓는다. 왕성인 서라벌 도시체계도 혁신적으로 변혁한다. 방리제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태종무열왕에 이르러 격자형 가로망을 갖춘 대도시로 거듭난다. 삼국유사는 '전성기에 서울 안 호수가 17만 8936호에 1360방이요, 주위가 55리였다'라 기록한다. 호수보다는 대체로 18만 인구로 해석한다.

달을 품어 함월산(含月山)인가? 마치 경주 수호신인 듯 동쪽을 막아섰다. 그 아래가 토함산(吐含山)이니 품은 달을 부러 드러냄인가? 역시 달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활산성에서 환도한 궁성이 반달 모양 월성(月城)이라는 건 유별난 상징이다. 지난 9월 말, 경주 읍성을 찾았다.

황성도(皇城圖) 삼국통일 전후의 전성기 서라벌을 그린 황성도. 월성과 대릉원, 황룡사가 랜드마크(Land Mark)처럼 우뚝하다. 방리제(坊里制)로 구획한 격자형 가로망이 정연하다. 삼국유사가 대도시 서라벌의 위용을 묘사했다.
황성도(皇城圖)삼국통일 전후의 전성기 서라벌을 그린 황성도. 월성과 대릉원, 황룡사가 랜드마크(Land Mark)처럼 우뚝하다. 방리제(坊里制)로 구획한 격자형 가로망이 정연하다. 삼국유사가 대도시 서라벌의 위용을 묘사했다. ⓒ 경주시청

남천이 깎아낸 천혜의 절벽이, 해자와 성벽을 겸했으니 방어가 수월했을 터다. 성의 북쪽에 해자를 넓게 파내고, 반달 모양 성은 흙을 돋워 높였다. 성벽을 수리하고 목책을 세워 방어를 강화한다. 그 위쪽 성 안에 궁궐과 관청을 빼곡히 들여 앉혀 도성의 위용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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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북쪽의 너른 개활지에 방(坊)과 리(里)를 정해진 규격에 따라 격자형으로 구획한다. 해가 떨어지는 북서쪽에 죽은 자들의 세계를 두었다. 지금의 대릉원이다. 남산엔 나라를 지키고 중생을 계도 하겠다는 의지로 불국토를 세웠다.

살아있는 모든 건 명멸하는 법이던가? 이토록 찬란한 서라벌이 통일하여 300년을 넘기지 못한다. 칼날보다 더 비정한 역사다. 927년 견훤의 말발굽에 왕이 목숨을 잃는다. 그로부터 8년 후인 935년 천년 사직이 종말을 고한다. 어느 시인의 한탄처럼 천년 도읍의 시간이 꿈처럼 흘러가 버렸다. 그랬어도 신라가 쌓아 온 천년은, 그로부터 다시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빛을 발하고 있으니 마냥 한탄할 일만은 아니다. 세상사 새옹지마 아니던가.

신라의 돌이 쌓은 읍성

견훤과 달리 유화적인 왕건에게 사실상 나라를 들어 바친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고려도 서라벌을 홀대하지 않는다. 동경이라 부르며 서경인 평양과 함께 무척 비중 있는 도시로 대우한다.

서라벌을 대신할 이름 '경주'도 고려가 지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은 경주를 식읍 삼아 978년까지 천수를 누린다. 고려가 경주를 어떤 위계로 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는 경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지정, 강력한 행정 기능을 부여한다. 1012년에 동경유수관으로 바꿔 약간의 변동을 가한다. 이후에도 경주방어사, 경주대도호부 등으로 바꾸지만 위상에 큰 변동이 가해진 건 아니다.

경주시가지 남측 옛 서라벌이다. 바로 앞에 대릉원이, 그 왼편으로 첨성대와 월성이 보인다. 멀리 남산이 우뚝하다. 고려 때 읍성을 쌓으며 이곳을 침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경주시가지 남측옛 서라벌이다. 바로 앞에 대릉원이, 그 왼편으로 첨성대와 월성이 보인다. 멀리 남산이 우뚝하다. 고려 때 읍성을 쌓으며 이곳을 침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 경주시청

동경유수관이던 그해, 첫 읍성이 축조된다. 규모 등에 대해선 자세하지 못하다. 읍성은 서라벌을 비켜 흙으로 쌓았다. 형산강 가까운 대릉원 북쪽이다. 여기를 선택한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 옛 신라인에 대한 존숭이다. 월성을 중심으로 남천과 북천 사이의 서라벌 옛터를 침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도 역력하다. 옛 신라 왕성에 대한 차분한 예우로도 읽힌다.

고려를 침략한 몽골군이 1238년 경주를 휩쓸고 지나간다. 머나먼 동쪽 끝 경주가 이때 쑥대밭으로 변한다. 황룡사구층목탑이 불타버린다. 통탄할 일이다. 몽골도 경주의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방증이다.

향일문과 경주읍성 2018년 복원된 경주읍성의 동쪽 성벽과 동문. 옹성 안의 동문이 고려 말 건립 당시 얻은 동문의 이름, 향일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향일문과 경주읍성2018년 복원된 경주읍성의 동쪽 성벽과 동문. 옹성 안의 동문이 고려 말 건립 당시 얻은 동문의 이름, 향일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 이영천

고려 말 우왕 때인 1378년 읍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다. <동경통지>는 "둘레가 4075척, 높이가 12척 7촌으로 석축이다. 남문은 징례문(澄禮門)이고, 동문이 향일문(向日門), 서문은 망미문(望美門)이며, 북문은 공신문(拱辰門)이다"라고 적고 있다. 규모와 4대 문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읍성 골격이 이때 갖춰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골격이 조선 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읍성을 축조하며, 신라의 여러 폐 사찰에서 석탑과 석재를 가져다 사용했나 보다. 석탑 부재로 추정되는 돌들이 성벽 곳곳에 아직도 박혀있다.

조선의 경주읍성

융성했던 서라벌 유적이 언제 희미해졌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고려를 지나오는 500년 동안 시나브로 지워졌으리란 추정이 타당해 보인다.

조선도 경주를 홀대하지 않았다. 경주부였으니, 상당한 위상이다. 개국 초에 경상감영을 둘 정도였으니 말이다. 상주와 경주를 번갈아 감영이 오가다 임진왜란 이후에 대구에 정착한다. 그 후부터 경주의 세력이 약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주읍성 모형 경주 동헌의 내아이던, 현 경주문화원에 재현된 경주읍성 모형. 남문에서 바라 본 조선시대 경주읍성의 관청과 객사 등 곳곳이 모형으로 잘 재현되어 있다.
경주읍성 모형경주 동헌의 내아이던, 현 경주문화원에 재현된 경주읍성 모형. 남문에서 바라 본 조선시대 경주읍성의 관청과 객사 등 곳곳이 모형으로 잘 재현되어 있다. ⓒ 이영천

고려 말에 개축한 읍성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다만, 이성계 어진을 보관한 집경전(集慶殿)을 두었던 건 분명한 의도를 가진 정치적 행위다. 여느 읍성의 객사나 사당과는 차원이 다른 통치 행위다. 전주 경기전을 위시해, 태조 어진을 보관한 5곳 중 하나로 취급한 명확한 의도가 있었다.

집경전 터 북성로의 계림초등학교 가는 길 옆 공터에 자리한 집경전 터 비석. 조선 왕조는 경주에 태조 어진을 보관하는 집경전을 두어 왕조의 이념을 이식하려 애썼다.
집경전 터북성로의 계림초등학교 가는 길 옆 공터에 자리한 집경전 터 비석. 조선 왕조는 경주에 태조 어진을 보관하는 집경전을 두어 왕조의 이념을 이식하려 애썼다. ⓒ 이영천

세종의 전국적인 읍성 개축 때, 경주읍성도 수리했을 개연성이 높다. 1451년 문종실록의 읍성 규모가 고려 말과 유사하다. 대문 셋에 해자가 없다. 해자는 메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1466년 세조실록에서 재확인된다. 공조에서 '해자가 막혔으니, 백성을 동원해 제방과 함께 보수하자'라는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훼철을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비격진천뢰로 왜적을 물리쳐, 성을 되찾은 건 무척 이례적인 사건이다. 군사는 물론 백성의 노력과 희생이 이룬 쾌거다. 경주의 중요성이 재확인되는 역사의 실제다. 17세기 중반 복원이 이뤄진다.

경주를 유교 통치 이념의 도시로 세우려는 조선의 의도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불국사와 불국토를 지향한 남산을 애써 축소한 흔적이 여럿이다. 왕정 통치가 이뤄지는 중심으로, 읍성의 위상을 높이려 무척 애썼다.

경주부(지승(地乘)_부분) 1770년대~1780년대 사이 그려진 옛 지도 지승의 경주부. 네모난 읍성에 관청이 빼곡하다. 남문 밖에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첨성대가 보이고, 그 옆으로 '반월성과 석굴'을 표현하였다. 남문 바로 아래 '종각'에 성덕대왕신종을 걸어 시각을 알리는 종으로 사용했다.
경주부(지승(地乘)_부분)1770년대~1780년대 사이 그려진 옛 지도 지승의 경주부. 네모난 읍성에 관청이 빼곡하다. 남문 밖에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첨성대가 보이고, 그 옆으로 '반월성과 석굴'을 표현하였다. 남문 바로 아래 '종각'에 성덕대왕신종을 걸어 시각을 알리는 종으로 사용했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이는 옛 지도에서도 역력하게 드러난다. 해학적인 첨성대에 비추어 불교의 흔적은 가급적 생략했다. 유일하다면 '성덕대왕신종'을 남문 밖에 매달아 시각을 알리던 종각을 강조한 사례 정도다. 성리학의 상징성이 강조된 조선의 봉건성은, 영화로웠던 서라벌의 쇠락을 더디지만 부채질했을 터이다.

도시 성쇠와 몸부림

1912년 이전까진 대체로 읍성이 온전했다. 그해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경주로 석굴암 구경을 왔나 보다. 그자가 다녀가면서 남문이 철거된다. 동시에 남쪽으로 도로가 넓혀지며, '노동'과 '노서'를 나눈 도로가 개설된다.

경주(1930년대) 남천과 북천 사이, 옛 서라벌이 사라져 휑한 논밭으로 남았다. 경주읍성의 윤곽이 그나마 남아있고,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철길(朝鐵慶東線)이 남서쪽에서 올라와 남동쪽으로 빠지고 있다.
경주(1930년대)남천과 북천 사이, 옛 서라벌이 사라져 휑한 논밭으로 남았다. 경주읍성의 윤곽이 그나마 남아있고,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철길(朝鐵慶東線)이 남서쪽에서 올라와 남동쪽으로 빠지고 있다. ⓒ 국토정보플랫폼

1918년 경주역이 동문 밖에 들어선다. 역을 중심으로 이때부터 도시가 확장한다. 노천역사박물관이랄 수 있는 경주가 도시화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음은 불문가지다. 해방 후 귀환인 마을이 동천동에 들어서면서 북천 건너편까지 시가지가 넓혀진다.

1933년 어느 일본인은 '성벽 대부분이 철거되고 무너져 잔해만 남았다'고 기록한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일제 강점기에 읍성이 훼손된 대신, 성 안은 경주의 경제와 상업 중심지로 재탄생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경주읍성(동벽) 2018년 복원 후 더는 복원이 막힌 경주읍성 동남쪽 끄트머리 성벽. 성벽으로 쓰인 돌들을 같이 전시해, 성벽에 쓰인 옛 서라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경주읍성(동벽)2018년 복원 후 더는 복원이 막힌 경주읍성 동남쪽 끄트머리 성벽. 성벽으로 쓰인 돌들을 같이 전시해, 성벽에 쓰인 옛 서라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이영천

화랑과 통일신라가 쿠데타의 합리화 재료로 절실했던 1970년대 독재 권력이, 그나마 경주에 관심을 보인다. 경주를 대대적인 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면서 종합 계획을 세운다. 알천의 보문호가 이때 크게 변신한다.

조선 시대 내내 경주의 중심지이던 성 안의 행정과 상업 기능도 이때 절정으로 치닫는다. 북부동, 동부동, 서부동으로 이뤄진 지역이다. 이곳을 한때는 성내동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1990년 이후 신개발지와 새로 들어선 세련된 관광지에 밀려나, 점차 슬럼화에 빠져든다. 급기야 전통의 중심성마저 빼앗기기 시작한다.

경주읍성(동벽과 동문) 시민들의 노력으로 2018년 복원된 경주읍성 동벽과 동문(향일문). 이로써 영화를 누린 경주읍성의 옛 흔적을 되짚을 수 있게 되었다. 북벽의 복원도 시작되었다. 이들이 부디 경주 도시재생의 마중물이 되길 빌어 본다.
경주읍성(동벽과 동문)시민들의 노력으로 2018년 복원된 경주읍성 동벽과 동문(향일문). 이로써 영화를 누린 경주읍성의 옛 흔적을 되짚을 수 있게 되었다. 북벽의 복원도 시작되었다. 이들이 부디 경주 도시재생의 마중물이 되길 빌어 본다. ⓒ 이영천

시민들이 나선다. 도심 재생의 하나로 성곽 복원에 착수한다. 2018년 동벽 대부분이 복원된다. 이게 옛 영광을 살려낼 마중물이라 속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여러 변화가 감지된다. 옛 동헌을 중심으로 온고지신의 멋이 자라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을 70년간 매달고 있었던 종각 지붕에도 따스한 볕이 들고 있다. 북벽 복원도 시작되었다.

월성에서 꽃 피운 서라벌 돌들이, 고려의 공신으로 대접 받았다. 도호부로 변신이 읍성을 쌓았다. 조선은 왕조의 이상을 둘레 2.42km의 읍성에 이식하려 애썼다. 경주를 대우한 각 시대의 흔적이다.

노천역사박물관인 경주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최소한의 파헤침이어야 한다. 놓인 돌멩이 하나도 쉬이 옮기지 말아야 한다. 백척간두에 선 소지 마립간의 결단이다. 그 결단이 2000년의 빛으로 남았다. 로마에, 아테네에, 북경에, 경주가 앞서지 못할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서라벌#소지마립간#동경유수관#경주읍성#집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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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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