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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은 내게 참 특별했다. 며칠 전 둘째 손주가 세상에 나와 두 아이의 할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명절 선물을 풍성하게 받은 것 같은 기쁨이었다. 산후조리원에서 회복 중인 며느리의 모습에서 젊은 시절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예나 이제나 엄마의 자리가 주는 묵직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오랜만에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네 살 손녀와 함께하는 명절이 되었다.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자주 보지 못해 낯섦과 반가움이 교차하던 것도 잠시 녀석은 3박 4일 내내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가장 경이로운 탐구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둘째 가온이 탄생 둘째 가온이가 태어났어요. 아빠랑 동생보러 갔어요. 신기했어요
둘째 가온이 탄생둘째 가온이가 태어났어요. 아빠랑 동생보러 갔어요. 신기했어요 ⓒ 최승희

오랜만에 만난 손녀는 그저 '아기'가 아니었다.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꼬마 숙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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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이거는 왜 그래요?"
"나는 이게 좋은데 할머니는 어때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나는 무릎을 치며 감탄하기를 반복했다. 네 살 아이와 모든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 아니 어른인 나보다 더 깊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빠가 세차를 멋떨어지게 하고서 대게 먹으러 출발 하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세차했는데 비가 오네" 하고 투덜거리자, 녀석은 천진난만하게 "아빠, 비 오는 것도 세차잖아!"라고 받아치며 어른들의 허를 찔렀다. 녀석의 특별한 세상은 일상의 소소한 순간 속에서 쉴 새 없이 펼쳐졌다.

밀가루 반죽 구절판 만들어요. ''전병은 제가 할께요' 하면서 열심히 휘젓는 손녀.
밀가루 반죽구절판 만들어요. ''전병은 제가 할께요' 하면서 열심히 휘젓는 손녀. ⓒ 최승희

주방에서의 요리 시간은 즐거웠다. 구절판 야채를 썰고 있는데 "차곡차곡 쌓아요, 당근 언니, 오이 오빠!"라며 직접 옮기기도 하고, 밀가루 반죽도 손녀가 힘차게 휘저었다. 저녁엔 제일 좋아하는 생선 구이가 그날따라 딱딱하게 느껴졌는지 "할머니, 오늘 생선은 왜 이리 딱딱해요? 내일 아침엔 부드러운 생선으로 해주세요"라며 정확한 어휘로 자신의 요구를 표현했다. '딱딱하다'와 '부드럽다'는 말을 자유자재로 쓰다니.

장난감 휴대폰을 들고선 "세아야, 나 나은이야. 넌 지금 뭐해? 난 할머니랑 그림책 보고 있어"라며 친구와 통화하는 앙증맞은 모습은 영락없는 꼬마 어른이었다.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순간은 따로 있었다. 내가 직접 만든 '손녀 나은이의 그림책'을 읽어주자, 다음 날에는 그림책을 보며 이야기를 스스로 재구성해 내게 되려 들려줬다.

그저 내용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이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저 '예쁘다, 귀엽다'는 감탄사로만 표현되던 손녀가,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작은 철학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낯설었던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나는 비로소 '손녀 사용 설명서'의 첫 장을 조심스럽게 넘길 수 있었다.

손녀가 돌아간 집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녀석이 남기고 간 온기와 재잘거림은 여전히 귓가에 선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내가 비로소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시간. 3박 4일은 내게 손녀라는 경이로운 세계를 탐험하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음 만남에서는 '손녀 사용 설명서'의 어떤 새로운 페이지가 채워질지 벌써 마음이 설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hwarang59에도 실립니다.


#추석연휴#명절#손녀와보내기#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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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새로운 일을 계획 중에 있으며 책을 읽으며 미술관 도슨트, 시낭송, 글쓰기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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