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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갈 거니?"
"오전에 출발해야 해요."
"그래, 그럼 보자... 지금 짐 싸야겠네."

여든여섯의 시어머니는 '봉다리'마다 먹을거리를 싸신다. 삼천포 수산물 시장에서 산 싱싱한 생선으로 만든 구이와 전, 삶은 문어, 탕국까지 담으시고 또 냉장고 안을 살피신다.

"김치 담갔다. 너거 줄려고. 맛이 있을랑가 모르겠다. 좀 싱거울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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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은 김치가 며느리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이시다. 나는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는다.

"음, 맛있어요. 삼삼하니."
"그렇나. 다 가져가거라. 어디 보자. 나물도 챙겨야지."
"어머니, 나물도 하셨어요? 차례도 안 지내는데, 이 많은 걸 다 하셨어요? 나물이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데..."
"다 했지. 너희 줄려고. 이때 아니면 언제 먹겠노."
"가만 있어 보자. 장엇국도 끓였는데..., 가져가서 안 먹으면 냉동실에 얼려두고 반찬 없을 때 데워서 먹거라."

어머니는 커다란 반찬 통에 국을 가득 퍼 담으며 며느리에게 일러두신다.

"참, 잡채도 했는데. 먹을 만큼 덜어 냉동 시켜 두고, 반찬 없을 때 데워 먹거라."

어머니의 음식 보따리는 끝이 없다. 밑반찬으로 깻잎 무침, 콩잎 무침, 오징어 무침까지 봉다리 봉다리 가득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신지 포도 한 박스까지 기어이 챙겨 주신다.

아들, 손자, 며느리 먹일 생각에... 그 모습이 선했다

쳇GPT가 그린 86세 어머니 쳇GPT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보따리 보따리 싸주시는 어머니 모습을 지브리스타일로 그려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완성되었다.
쳇GPT가 그린 86세 어머니쳇GPT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보따리 보따리 싸주시는 어머니 모습을 지브리스타일로 그려 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완성되었다. ⓒ 이정미

"내가 언제까지 챙겨줄 수 있겠노. 챙겨줄 수 있을 때 해 주는 거지."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셨어요?"
"며칠 했지..."

어머니는 순하게 웃으셨다.

구순을 향하고 있는 어머니는 자신의 부재를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다. 아들, 며느리, 손자 먹일 생각에 몇 날 며칠 장을 보시고, 연로하신 몸으로 음식을 장만하셨을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며느리를 늘 안쓰럽게 생각하시는 어머님이시다.

어머니는 물가가 비싼 도시에 사는 우리를 늘 걱정하셨다. 결혼해서 지금껏 해산물은 거의 어머니께서 장만해 주셨다. 삼천포 생선이 신선하고 맛도 좋다며 조개, 새우, 여러 가지 생선을 사다가 냉동해서 준비해 주셨다. 우리 집 냉동실에는 어머니가 보내주신 해산물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그 해산물로 된장국, 미역국을 끓였고, 생선 조림이나 구이를 시장에 가지 않고도 수월하게 밥상에 올릴 수 있었다.

지난 날, 명절 때마다 제사 음식을 가득 싸주시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제사 나물과 탕국, 각종 기름진 전을 명절 끼니로 실컷 먹었는데, 집으로 가져오면 결국 다 먹어내지 못하고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죄책감이 들었고 괜히 '어머니는 뭣 하러...' 하며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괜찮다'며 음식을 안 가져오면 어머니가 서운해 하실까 봐 말은 못하고, 감사함과 난처함, 죄책감, '다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로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다.

"요즘 며느리들 시어머니가 싸 준 음식을 집에 가자 마자 다 버린다더라."

이런 말들이 며느리를 둔 시어머니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오가던 때였다. 매스컴에서도 명절 증후군이나 명절 후 가족 간 갈등 증가 등 명절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담은 내용들이 도드라졌다. 지금은 명절 풍경이 많이 달라졌다. 차례를 지내는 집도 급격하게 줄었다. 콘도나 펜션을 예약해 온 가족이 그곳에서 여행하듯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우리 집도 지난해부터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시누이가 "요즘 추석 지내는 집이 어디 있어? 엄마, 하지 마세요" 하고 누누이 당부한 것이 한 몫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평생 해오신 대로 추석 음식을 준비하신다. 그리고 아들, 며느리, 손자를 기다리신다.

이제는 안다, 그 '봉다리'의 의미를

어머님께 명절은 '우리를 기다리는 날'이고 '우리를 먹일 음식을 준비하는 날'이자 '장만하신 음식을 가득 담아 우리에게 주시는 날'이다. 오십 고개를 넘으며 이제야 나는 어머니의 그 마음을 오롯이 알 것 같다. 어머니가 주시는 음식 봉지 하나 하나가 어머니가 '살아가는 의미'이며 사랑임을 이제는 안다.

집에 와서 어머니가 주신 음식을 하나 하나 꺼내서 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한 번 먹을 만큼 소분해 냉동했다. 반찬이 없을 때 어머니는 또 우리를 이렇게 먹일 것이다.

"할머니가 몇 날 며칠 너희 생각하며 준비하셨어. 맛있게 많이 먹자!"

나도 딸과 아들이 타지에 있다 보니, 어머니처럼 먹을 것을 제일로 걱정하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먹거리는 냉동했다가 챙겨주게 된다. 알게 모르게 어머님을 그대로 닮은 며느리가 되어 가는 나를 발견한다.

지난 여름, 어머니는 눈에 띄게 기력이 약해지셔서 2주 간 병원 신세를 지셨다.

"내 걱정 마라. 나는 잘 있다. 너거나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고."

홀로 계셔도 이렇게 말씀하시며 자식에게 조금의 부담도 주지 않으려 애쓰시는 분이셨다. 그런 분이 갑자기 살이 눈에 띄게 빠지고 기력이 영 없어 보였다. 말로 잘 내뱉지 않으시는데 "내가 영 힘이 없다" 하셨다. 다행히 병원에서 종합적으로 건강을 검진하고 요양한 후 건강은 많이 회복되었다. 잘 드시니 살도 오르고 가벼운 걷기와 스트레칭을 하시며 체력도 좋아지셨다.

덕분에 이번 추석도 어머니는 그렇게 우리를 먹이고 음식을 보따리, 보따리 싸주시며 할 일을 잘 마친 사람만의 편안한 잠을 이루시는 것 같다. 말씀처럼, 어머님의 명절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이 유한한데, 그래서 그 명절이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다.

이제 나는 "어머니, 주신 반찬 너무 맛있게 잘 먹고 있어요" 하며 전화 한 통 넣을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래, 아가, 밥 잘 챙겨 먹고, 우짜동동 아프지 말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하실 테다.

#어머니#어머니의사랑#음식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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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간 초등교사로 재직. 7년간 교육청 장학사로, 2년간 교감으로 일한 후 현재는 교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책읽기, 글쓰기, 여행을 좋아합니다. 타인과 연결되어 자신의 성장을 너머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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