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엄한 까치까치 한 마리가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에 앉아 있다. ⓒ 이정민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한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이며 표현력이 뛰어난 문자로서,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180여 개국에서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고 있으며, 세종학당은 세계 곳곳에서 운영된다. K-POP과 드라마, 음식 등 한류와 함께 한글은 이제 세계인의 문자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은 해외 학자들에 의해서도 높게 평가되었다. 일본 학자 노마 히데키는 <한글의 창조>라는 책에서 한글을 "세계 문자사에서 유례없는 창조"라고 정의했고, 이 책은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았다.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박중현 교수(우리나라 최초의 물박사)는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책이 잘 나오지 않는 걸까요? 일본 학자가 보기에 이토록 훌륭한 업적이라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도 더 깊이 있게 세계에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종대왕의 두 업적, 공통의 철학
세종대왕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1446년 훈민정음 반포, 그리고 그보다 앞선 1441년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제도인 측우제도의 시행이다. 겉으로는 문자와 물 관리라는 전혀 다른 분야 같지만, 두 업적은 "흩어진 것을 모아 모두가 함께 쓰게 한다"는 철학적 공통점을 지닌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한 말모이, 측우제도는 백성을 위한 물모이였다.
오늘날 기후위기 시대에도 이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산불, 가뭄, 홍수, 폭염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빗물을 누구나 쉽게 모아 쓰는 일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동안은 '빗물저금통'과 같은 작은 실천이 강조되었지만, 이제는 도시 전체 차원에서의 물 관리가 요구된다. 세계 곳곳에서는 빗물을 흡수·저장·활용하도록 설계한 스펀지시티 (Sponge City), 녹지와 습지를 활용한 그린 인프라(Green Infrastructure), 개발 단계에서부터 물순환을 고려하는 저영향개발 (LID, Low Impact Development) 등이 새로운 도시계획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빗물을 포함해 지하수, 하천수, 하수재이용수 등 모든 물을 하나로 보고 관리하는 '원 워터(One Water)' 개념 역시 국제적 흐름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15세기 세종대왕이 측우제도를 통해 빗물을 '보이는 물'로 만든 정신과 다르지 않다. 백성을 위한 물 관리 철학이 이제는 도시 차원, 세계 차원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박중현 교수는 병상에 누워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학문과 미래를 깊이 고민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평생을 물에 대해 연구해 온 노학자의 당부는 더욱 울림이 크다.
"측우제도를 만든 세종대왕의 업적을 우리가 남에게 빼앗기지 말고 더욱 발전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훈민정음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처럼, 빗물을 관리하는 철학 역시 우리가 주도적으로 알릴 때입니다. 단순히 철학을 알리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철학을 뒷받침하는 기술 개발과 적용까지 우리가 함께 주도해야 합니다."
천지인의 조화, 오늘의 과제
훈민정음은 천·지·인(天地人)의 철학을 담았다. 하늘(ㆍ), 땅(ㅡ), 사람(ㅣ)을 조합해 모든 모음을 만든 것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깊은 뜻이었다.
빗물 관리도 마찬가지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땅에 스며들고, 그것을 인간이 지혜롭게 모아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천지인의 조화를 실천하는 물 관리다.
훈민정음이 말의 민주화 혁명이었다면, 측우제도는 물의 민주화 혁명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두 유산을 계승하고 세계와 공유할 때, 세종대왕의 정신은 기후위기 시대를 넘어 다시 인류에게 희망으로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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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link24.kr/DaPTSKg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빗물을 연구하는 과학자이자, 국제물협회의 빗물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UN인증 NGO인Rain For All 을 운영하며 국제레인스쿨 이니셔티브를 전개하면서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글자와 빗물을 돌려주었던 정신을 오늘의 기후위기 시대에 되살리고자 한다.
특히 이 철학을 세계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1441년 세종이 측우제를 반포한 날인 9월 3일을 ‘유엔 비의 날(UN Rain Day)’로 지정할 것을 국제사회에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