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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7 18:41최종 업데이트 25.10.07 18:41

고향은 거기 있으려나... 96세 실향민의 애타는 향수

아버지가 회고하는 북한 고향에서의 추석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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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건너 고향 개풍군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건너 고향 개풍군 ⓒ 이혁진

6.25 전쟁 당시 잠시 피하고 돌아가려고 이북 고향을 떠난 지 75년 성상이 지났다. 세월이 흘러도 추석이 다가오면 망향의 정은 솟구친다. 아버지 고향 개풍과 개성은 38선 이남인데 휴전 당시 전략상 불리하다는 이유로 임진강을 경계로 북에 내주고 가족들은 생이별해야 했다.

추석은 아름다운 전통풍습이지만 분단상황의 남북한 명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특히 남쪽에서 실향민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추석을 대하는 감정과 느낌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고향이라는 정체성을 잃은 실향민의 심정을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실향민들은 추석 하면 고향부터 떠올린다. 찾아갈 고향이 없는 월남가족은 한 맺힌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따뜻한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이 그립기 때문이다. 해서 추석 즈음 이북고향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임진각, 오두산통일전망대, 강화평화전망대 등 접경지에 가 위안을 삼는다.

실향민들은 고향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한다. 추석이면 들뜨는 분위기지만 실향민들의 마음은 되레 무겁다. 고향에 갈 수도 반길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96세 아버지가 바로 그런 경우다.

아버지가 회고하는 어릴 적 추석 풍경

 추석날, 아버지가 와우수술한 작은 아버지의 머리를 살피고 있다.
추석날, 아버지가 와우수술한 작은 아버지의 머리를 살피고 있다. ⓒ 이혁진

추석을 맞아 아버지가 이북 고향 개풍에서의 어릴 적 추억을 더듬었다. 이야기는 아버지의 생생한 증언이자 망향가이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까지 10대를 고향에서 명절을 보냈다. 추석이면 전국에 흩어진 가족과 친지들이 우리 종가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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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선산에서 벌초하고 성묘했다. 집안 어른들은 햇과일 몇 개에 소주를 묘소에 올리고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길 빌었다. 그때는 추석이 단 하루였다. 지금처럼 연휴가 길지 않았다. 추석을 쇠고 바로 다음 날 고달픈 일상으로 돌아갔다.

어른들은 봉분의 잡초를 뽑을 때는 낫을 대지 않고 손으로 직접 했다. 이것이 조상을 경배하는 차원의 행위라는 걸 아버지는 그때 깨달았다. 실제 뵙지 못했지만 조상의 면면과 공덕을 그림 보듯 알고 기억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추석 때 들려준 설명 덕분이다.

추석이라도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일제가 쌀과 전쟁물자를 수탈해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피죽도 감지덕지한 시절이었다. 일제는 제사도 금지했다. 당시는 술도 빚지 못하게 하고 적발하면 구금했다.

마을에는 명절과 제사용으로 쌀을 숨기거나 몰래 거래하는 걸 일경에 밀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제는 추석 명절에 대한 조선인들의 의식이 너무 강해 차례를 지내거나 조상묘에 헌주하는 걸 묵인하기도 했다.

아버지처럼 어린아이들은 추석날만큼은 쌀밥을 구경할 수 있는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보리밥에 쌀 몇 톨 들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이날만큼은 더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옛말은 당시로서는 절절했다.

이제는 북에 있는 가족들 걱정

 추석에 차린 조촐한 밥상, 차례는 성묘로 대신했다.
추석에 차린 조촐한 밥상, 차례는 성묘로 대신했다. ⓒ 이혁진

아버지는 지금 북에 있는 가족과 친지들을 더 걱정하고 있다. 여전히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탈북민에 따르면 추석명절에 당에서 쌀과 약간의 식량을 배급했지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그것마저 끊어진 상태이다.

아버지는 고향산천의 옛 모습을 잊지 못한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선영과 산소가 제대로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다. 실제 오두산전망대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고향땅은 모든 것이 사라져 성묘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1980년대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개성시내와 역 등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북은 6.25 전쟁 이후 가족을 서로 떼어놓고 연락하지 못하도록 개성시민들을 함경북도로 강제추방하거나 이주시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일 후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히 살아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실향민들이 만나면 하는 덕담이었지만 이러한 말도 거의 사라졌다. 대부분 돌아가시고 남은 사람도 구순이 넘었다.

그럼 이북 고향을 지키고 있는 부모와 친지도 전무한 실정에서 실향민들의 고향방문과 망향의 꿈은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가까운 생명권이다.

북에 있는 가족들도 살아있다면 아버지처럼 추석의 지난 추억을 그리워할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배고픔과 고생 속에서도 추석명절 가족 간 깊은 유대와 행복했던 추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추석의 의미를 되새겼다.

실향 이산가족 상봉의 희망은 세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남북이 점점 경색국면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실향민들의 시름은 깊어만가고 있다. 추석을 맞는 실향민들에게 보다 따뜻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60대 이상 시민기자들의 사는이야기
#실향민#망향#추석명절#개풍군#임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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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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