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붉다, 발갛다, 빨갛다. 벌겋다, 뻘겋다. 발그스름하다. 발그스레하다, 불그레하다, 불그스름하다,
빨그스름하다, 벌거죽죽하다 등. 수십 개에 이르는 붉은 색을 뜻하는 우리말. 한글이 아닌 그 어떤 글이 하나의 색깔을 두고 그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이토록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제579돌 한글날이 다가온다. 한글날이 되면 전국 곳곳에서 다채로운 한글문화행사를 개최한다. 하지만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한글을 얼마나 아끼고 사용하려 애쓰는지를 살펴보면 씁쓸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언젠가 문해력에 대한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천시 OO으로 장소변경'을 우천시에 있는 oo지역으로 장소를 바꾸는 것이라고 이해했다거나, '교과서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반납하세요'라는 말을 듣고 교과서를 직접 구매해서 반납하는 일도 벌어졌다. 또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에 '중식 제공'이라는 글을 보고 학부모가 '우리 아이에게 중식이 아닌 한식을 제공해달라'고 요구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금일'을 금요일로 알아듣거나, '사흘', '나흘'이 3일, 4일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어느 학교에 근무하는 수학 교사는 두 줄이 넘는 수학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문제를 풀려는 시도조차 못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했다. 또 어느 영어교사는 영어지문이나 단어를 한글로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 자신이 영어교사인지 국어교사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고도 했다.
동네 마트에 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데 한쪽 구석에 있는 네모난 물체에 '촉수금지'라고 써서 붙여놓았다. '손대지 마세요'라고 쉽게 쓰면 될 것을 굳이 어려운 말을 쓴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반포하기 전까지 우리는 천 년이상 한자를 사용해왔다. 따라서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말에 녹아든 한자어와 생경한 한자는 다르다.
고등학교에서 30년 가까이 국어를 가르쳐온 나로서는 이런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씁쓸하다. 유아 영어고시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영어교육에는 온 정성을 다하면서도 정작 언어습득이 중요한 시기인 어린 나이에 국어교육에는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을까.
세종대왕께서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힘들게 한글을 만들었음에도 언문(諺文 상말)이라 부르며 홀대하고 멸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영어가 세계인의 소통수단이며 공용어로 활용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영어교육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쉽고 아름다운 우리글의 소중함을 깨우쳐주고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하려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예쁜 우리말을 떠올려본다. '미리내(은하수).' '윤슬(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물결).' '시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 여우비(햇볕이 나있는데 잠깐 내리다가 그치는 비).' '고샅(마을의 좁은 골목)' '온새미로(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생긴 그대로)' 등. 그리고 '도란도란'을 듣고 있노라면 가족이 가까이 둘러앉아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따뜻한 장면이 저절로 떠오른다. 한글은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기호에 머무는게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이고 힘이다. 한글날 하루만 요란하게 한글을 내세울게 아니라 그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