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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인천 미추홀구 아인병원에서 의료진이 신생아들을 보살피고 있다. 통계청은 이날 지난해 출생아 수가 2월 23만 8천 3백 명으로 1년 전보다 8천 3백 명 늘었다고 발표했다. 출생아 수가 증가한 것은 2015년 이후로 9년 만이다.
26일 인천 미추홀구 아인병원에서 의료진이 신생아들을 보살피고 있다. 통계청은 이날 지난해 출생아 수가 2월 23만 8천 3백 명으로 1년 전보다 8천 3백 명 늘었다고 발표했다. 출생아 수가 증가한 것은 2015년 이후로 9년 만이다. ⓒ 연합뉴스

격세지감이랄까, 상전벽해랄까.
4.19혁명을 전후하여 한국사회의 걱정거리에는 인구의 과잉출산이었다. 비좁은 땅에서 먹고 살기는 힘든 데 꼬박꼬박 아이들이 태어났다. 무슨 법칙 또는 현상인지, 가난한 집안일수록 딸린 자식이 주렁주렁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에서 큰 이슈, 사회현안 중에는 인구소멸이 포함됐다. 심지어 얼마 후에는 인구문제로 한국이 지구상에서 소멸할 것이란 극단론까지 제기된다. 그때는 아이를 많이 낳아서 위기가 되었는데 지금은 출산율이 줄어서 소멸위기가 되고 있다.
1960년대 초 서울 광화문 지하도에는 '가족계획상담', '정관시술 권장'이란 푯말을 책상에 붙이고 앉아있는 여성들이 지나가는 젊은 남성들에게 "정관시술을 하시라"고 권유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전국 각 도시에서도 있었다. 정부가 나서 계몽운동을 벌인 만큼 인구가 팽창한 것이다.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던 터에 정부의 '가족계획'이 진행되어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가 나붙고 일부 회사에서는 정관시술을 한 직원만을 채용하고 사회 각계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나타났다.
이 시기 '산아제한'과 '가족계획'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일었다. 그중에서 이색적인 논쟁은 천주교 춘천교구 서석태 신부와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였다. 기독교 신·구교의 지도급 인사들이 산아제한을 두고 시비논쟁을 벌여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발단은서석태가 <사상계> 1960년 7월호에 '천주의 법과 산아제한'을 발표하고 같은 책에 강원룡이 '하나님의 말씀과 산아조절'을 썼다. 잡지사 편집진이 사회적 관심이 많은 현안에 대해 두 사람에게 논제를 주고 함께 실었던 것이다. 서석태의 '천주의 법과 산아제한'의 주요 대목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가톨릭은 산아제한을 반대합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가톨릭이라는 그것 때문에 덮어놓고 이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 가톨릭은 신의 법이라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은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가톨릭이 산아제한을 반대하는 것은 산아제한이란 것이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진리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한 개 현상이나 사물에 관한 진리가 판명되면 거기에 아무리 크고 벅찬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언정 무엇보다도 먼저 그 진리에게 복종하려는 열렬한 염원과 의무가 전제적으로 필요하게 됩니다. 진리는 노리갯감이나 어떤 애완품, 기호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각자 사람마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함부로 뱉어버릴 성질의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탐구함에는 건전하고 편파 됨이 없으며, 아울러 공상에서 벗어난 두뇌, 그리고 괴벽과 경솔을 극복한 이성, 또한 진리에 대한 열화 같은 사랑이 가장 긴요한 선행조건이 되지 않아서는 아니 됩니다.
서석태는 이어서 "현대는 사상의 최대의 불안의 시대, 공포의 시대라고 외치고 있다"면서 벨륙의 '크나큰 이단', 스팽글러의 '서양의 황혼', 카아렌의 '알려지지 않은 인간', 휘징가의 '문명의 위기', 홉스의 '혼이 없는 시대' 스로타트의 '문명의 반역', 알게르비센의 '문명의 적인 신 없는 인간들', 기온의 '현대세계의 위기', 마리뗑의 '신을 찾는 유럽' 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산아제한은 왜 그릇된 것인가를 설명한다.
"산아제한은 왜 죄악인가? 아니 그것이 도대체 죄악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가?"라는 이 질문은 일반 세속인들 뿐 아니라, 우리 가톨릭 안에서도 어떤 신도들간에 논의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 속에는 흔히 산아제한에 찬성하려는 경향이 숨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맡겨진 우리 자신의 문제를 신법 자연법에 번역해 가면서도 용이하게 편리하게 해결하자는 의욕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속의 생활만에 중점을 두고, 천주(天主)의 나라 영생의 천국을 절실히 동경하지 않는 사람들이라 하겠으며, 아울러 산아제한을 반대하는 가톨릭의 엄숙한 이유, 규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강원룡은 '하나님의 말씀과 산아조절'에서 반론을 제기한다. 먼저 그는 이 논문이 필자 개인의 입장이고 신교의 모든 신도들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글의 후반이다.
도대체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윤리문제에 대해(전면적으로, 보편적으로, 함수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문제란 있을 수 없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아래에 사는 유한한 인간에게 주시는 명령이 이와 같이 화석처럼 고착된 원칙으로 만들어져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칼 발트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계명은 항상 이 사람의, 이 사태에 대한 지시로서, 또 사람의 의향 결심 행동의 하나의 정해진 가능성에의 선택에 대한 지시로서 존재하고 있다. 인간인 윤리학자가 성서의 여기저기서, 그리고 자연법이나 전통적 명제 속에 수집한 요강을 가지고 그것을 마치 만고불변의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으로 삼아 가지고 모든 인류의 행동을 심판하는 규준을 삼는다는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오만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아조절을 위해서 필요한 법령이나 시책도 강구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산아조절을 강요하는 법령이나 시책을 펴서는 안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임신이나 출산은 결혼한 부부의 책임적인 행위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들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산아조절을 유가적 시책으로 권장하는 사회에서도 어떤 결혼한 부부가 많은 자녀를 지키는 것이 자기들의 소명이라 생각하거나 혹은 자기의 신앙양심이 산아조절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행치 않는 그들의 자유로운 결단을 비난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식량 사정이나 경제적 난제가 해결되어 산아조절의 필요가 없어지는 시기가 올지라도 어떤 부부가, 특히 그 부인이 한 사명감이나 천부의 재능을 살리기 위해 산아제한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위를 비난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행인의 자유로운 결단을 전제로 하고, 나는 현재의 상황 아래에서 산아조절을 찬성함이 옳다고 주장한다.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현대사#현대사논쟁#현대사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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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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