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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하는 사람들
대화하는 사람들 ⓒ 연합=OGQ

나보다 앞서 들어왔던 요양보호사가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한다. 일이 서툴러서? 아니 그 분은 요양병원에서 나름 잔뼈가 굵었던 분이라고 했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요양보호사 일이 내 연배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니, 일이 힘들어, 더구나 경험까지 있었던 사람이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싶다. 아마 그보다는 3개월 이라는 시간 동안 겪은 인간 관계의 늪에 스스로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건 아닐까.

정작 일보다 어려운 건?

얼마 전 겪은 일이다. 기저귀 카트를 급하게 끌고 가다 다른 방향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 선생님과 부딪쳐 주저 앉았다. 주저앉을 당시에는 엉덩이를 꽁 하는 바람에, 엉덩이 뼈를 다쳤나 했다. 앞서 식당에서 의자를 못 보고 주저 앉는 바람에 엉덩이를 다쳐서 한동안 고생하시는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그 날 집에 가는데, 아픈 곳은 엉덩이보다는 정강이 뼈였다. 발목도 아니고 정강이 뼈가 디딜 때마다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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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계속 된 통증에 간호사 님을 찾아갔다. 마침 우리 층 간호사 분이 안 계셔서 위층 간호사 분을 찾아가 일을 하는 데 아프니 약을 얻을 수 있나 했더니, 우선은 진통제를 우선 주시면서, '실금'이 갔을 수 있으니 병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을 해주셨다.

며칠 후 식당으로 가는 길에 그 간호사님을 다시 만났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말씀을 하셨다. 마치 당신이 내가 병원에 가는 것을 부추긴 것처럼 말이 돈다는 것이다. 원내에서 사고가 나고 요양보호사가 다치면 원칙적으로 '산재'에 속한다. '사고'라던가, '산재'라던가 하는 건 이곳에서는 가급적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안인 것이다.

굳이 그 분의 조언이 아니었더라도 계속된 통증에 병원을 찾을 생각이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니니 번거롭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지만, 원내에서 다친 거니 되든 안되는 절차에 맞춰 처리하는 게 맞겠다 싶어 사무실에 알렸다. 그 과정에서 간호사님의 말씀도 전했는데, 그게 와전된 것이었다. 소문은 말보다 빠르게 요양원 내에 돌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조언'이 '부추김'이 되었으니, 어쨌든 나 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졌을 처지, 죄송하다며 사과를 드렸다.

내가 일하는 층에는 간호사까지 합해서 총 11 분의 요양보호사 분들이 일하신다. 내가 일하는 층이 2층, 여기 요양원은 5층까지 있으니 줄 잡아 50 여 분이 이곳에 몸담고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최근에야 남자 요양보호사 분들이 한 분씩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래봐야 각 층에 한 분씩, 그 분들을 제외하면 전층의 요양보호사나 간호사 분들은 대부분 여자분들이다.

꼭 여자 분들이래서가 아니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들이 서로 간에 대화로 채워진다. 그 대화는 어르신들의 병환과 관련된 사안도 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고 이른바 다른 층의 소식들이 화제가 되곤 한다. 예를 들면 앞서 나의 '사건' 같은 것 들이다. 말은 돌고 돌아, 2층 신입이 다쳤다더라가 금방 3층 간호사가 병원 가보라고 부추겼다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에는 '해석'이 붙고, 그 '해석'은 각색이 되고 층과 층 사이에 회자된다.

사람은 더불어 살기 위해 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 '말'을 만들어 냈고, 그 '말'로 '대화'를 나누며 살아간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말'이라는 것이, '대화'라는 것이 참으로 취약한 연결 수단이라는 것이다.

요양보호사 교육 과정에 '메라비언의 법칙'이 나온다. 의사 소통 유형에 대한 것으로 실제 사람들 사이의 의사 소통에서 언어적 요소는 불과 7%에 불과하다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대화의 상황이나, 분위기, 표정 등에서 비롯된 비언어적 요소가 소통의 내용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 그 자체보다는, 누가 그 '사실'의 주인공이고, 내가 그 '사실'의 주인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똑같은 내용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거기에 누군가의 한 마디 해석이 곁들여진 내용은 전달되는 내용을 원래와 전혀 다른 뉘앙스로 느껴지게도 한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한 선입견, 혹은 그걸 전달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른 정보들이 날마다 차고 넘친다.

60 넘어서 시작한 새로운 사회 생활의 진짜 미션

그러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 이게 '사회 생활'이라는 거구나 라고 말이다. 60 평생 사회 생활을 하며 살았지만, 강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혹은 글을 쓰며 살아왔던 나는 이른바 '프리랜서'로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사회 생활을 했다. 주변에 친지들은 있었지만, 그건 '호의'에 입각한 작은 공동체였다. 허긴 돌아보면 그 '호의'에 입각한 인간 관계들도 녹록한 것은 아니었으니.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아이들의 학부모이자 친하게 지내던 이웃 엄마가 식사 자리에서 '친한 만큼 더 잘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항의를 대놓고 하는 것을 경험한 이후, 이웃 주민과 학부모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나름 공과 사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게 사회 생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8시간, 아니 휴식 시간까지 합쳐 10 시간을 함께 어우러져 사적인지, 공적인지 모를 말과 말이 난무하는 상황에 새롭게 던져지다 보니, 당혹스러웠다.

mbti I인데다가, 친한 이들과의 스몰 토크도 길어지면 집에 와서 '정화'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러다가 이젠 하루 종일 '대화의 향연' 속에서 지내고 있다. 이것이 나이 60에 시작한 사회 생활의 진짜 미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초보 서퍼처럼 그래서 날마다 닥쳐오는 사람들의 파도를 맞이하여 넘어지고, 자빠지고, 그래서 허우적거리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제쯤인가는 능숙한 서퍼가 되어 이 사람들의 파고를 자유자재로 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60대는구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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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을 떠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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