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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동백동산 습지(먼물깍) 전경
제주 동백동산 습지(먼물깍) 전경 ⓒ 고제량

기사 제목에 사용된 '어느 마을'은 제주시 조천읍 소재 선흘리 마을을 가리킨다.

선흘리 마을은 세계가 주목하는 자연유산을 두 곳이나 품고 있다. 선흘1리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동백동산'이, 선흘2리에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거문오름'이 자리하고 있다.

동백동산은 용암언덕 위에 원시림이 형성된 숲(곶자왈)이다. 숲 바닥 곳곳에 수백 개의 작은 습지들이 흩어져 있는 독특한 생태계를 자랑한다. 제주비바리뱀, 팔색조 등 15종이 넘는 멸종위기종을 포함해 1,500여 종의 생물이 서식해 세계가 함께 지켜야 할 '람사르 습지'로 지정됐다. 람사르 습지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전하기 위한 국제 환경 협약, '람사르 협약'에 따라 그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된 습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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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오름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이곳에서 분출된 용암이 지표를 따라 흐르며 만장굴을 비롯해 거대한 용암동굴계를 형성했는데, 그 지질학적 가치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름다운 만큼 개발 압력도 거센 이 두 마을이 민주주의에 대한 남다른 감각으로 회자되고 있다기에, 지난 9월 5일 제주를 찾았다.

제주에서 만난 기자에게 두 마을의 남다른 민주주의 감각을 소개해준 해설자는,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제주에서 생태관광을 이끌어온 고제량 (사)제주생태관광협회장. 사실 고제량¹ 회장은 해설자이자, 15년 이상 선흘리 마을과 함께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동반자이기도 하다.

 제주 동백동산에서 생태관광 가이드에 나선 고제량 회장.
제주 동백동산에서 생태관광 가이드에 나선 고제량 회장. ⓒ 고제량

제주 조천읍 선흘리 마을 이야기의 나레이터인 고제량 회장은 누구
고 회장은 제주 관광의 구조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며 대안을 만들어 온 인물이었다. 1990년대 초 환경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자연을 밀어버리고 리조트를 짓고 원주민을 내쫓는 제주의 전형적인 개발 방식에 깊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2003년 '(주)제주생태관광'을 설립했다.

목표는 명확했다. 첫째, 관광이 환경을 훼손하지 않을 것. 둘째, 외부 자본이 아닌 지역 주민이 돈을 벌 것. 셋째, 교육적·공공적 의미를 담을 것. 관광사업을 하겠다는 목적보다는 환경을 지키기 위한 관광의 대안을 만들어 가겠다는 발상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외부 자본이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숙소 대신,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민박과 마을 식당을 이용하고, 주민 해설사와 함께 제주의 역사와 생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여행을 만들어냈다.

선흘리 마을과의 인연은 2010년, 동백동산이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시작됐다. 그는 개별 회사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정책 제안과 주민 역량 강화를 위해 만든 '(사)제주생태관광협회'의 이름으로 마을에 들어갔다. 그는 "잘 보존된 자연이 내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것을 주민 스스로 느껴야 한다"는 믿음으로, 주민들에게 생태관광을 제안했다. 람사르습지를 보전하는 일은 곧 주민들의 삶을 지키는 일이었고, 선흘리 마을은 그렇게 15년 가까이 그의 가장 중요한 현장이었다.
고제량 회장이 전하는 선흘리 마을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위임받은 소수의 일탈, 다수의 합의로 바로잡다

고제량 회장은 먼저 선흘2리에서 추진됐던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을 언급했다. 제주동물테마파크 사업은 선흘2리 58만㎡ 부지에 사자·호랑이·불곰 등 맹수를 사육하는 대규모 동물원을 짓는 프로젝트다. 원래는 콘도와 승마장을 건설하려던 사업이었으나, 2016년 대명그룹이 인수하면서 동물테마파크로 변경됐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거문오름도 있고, 국제협약(람사르협약)에 따라 보호습지로 지정된 동백동산이 인접해 있는데도 개발이 될 수 있나?"라고 묻자, 고제량 회장은 "동물테마파크 예정 부지는 거문오름과 동백동산하고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 개발을 해도 되는 것 아닌가?"라며 조심히 묻자, "생태계는 선 하나 긋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구분할 수 없다"면서 "보호구역과 연결된 생태계에서의 대규모 개발은 수질 오염, 소음, 야생동물 서식지 단절 등을 통해 핵심 습지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2019년 4월, 선흘2리 마을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찬성 17표, 반대 84표로 동물테마파크 사업에 대한 '반대'를 공식적으로 의결했다.

하지만 주민들을 대표한다는 마을 이장 정아무개씨는 다수의 의견과 배치되는 행보를 벌였다. 2019년 7월, 마을 이장이 사업자인 대명 측과 '밀실 상생협약'을 체결한 것이다. 총 7억 원의 마을발전기금을 받는 조건으로 사업에 협력한다는 내용이다. 사업자로부터 계약금 명목으로 3억 5천만 원이 마을회 통장으로 입금됐고, 사업이 최종 승인되면 나머지 3억 5천만 원을 지급받기로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 170명은 "마을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협약은 원천 무효"라며 집단으로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주민총회도 열었다. 주민 130여 명은 2019년 8월, 마을 임시총회를 열고 거수투표를 통해 찬성 127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밀실 상생협약'을 무효화했다. 이어서 진행된 무기명 투표에서는 찬성 125표로 이장 해임안을 가결시키며, 주민의 뜻을 배반한 리더를 직접 끌어내렸다.

이후 새롭게 구성된 마을회는 2022년, 전임 이장이 받았던 마을발전기금 3억 5천만 원과 그 이자를 법원에 공탁하는 방식으로 돈을 돌려주며 불법적인 거래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고제량 회장 역시 지역 갈등을 공론화하며 힘을 보탰다. 당시 그는 제주 람사르 습지도시 지역관리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위원회는 람사르 습지도시 인증 이후, 지역의 보전과 현명한 이용 원칙을 세우고 행정·기업·주민 간 의견을 조율하는 공식 협의 기구였다. 제주도의회는 사업 허가 조건으로 "위원회의 의견을 반드시 들을 것"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고제량 위원장은 "위원회의 공공성을 복원하겠다"며 밀실협약 대신 마을주민과 위원회의 총의를 모아 개발 저지에 나섰다.

주민들과 고제량 회장의 노력 끝에 제주동물테파크 개발은 결국 무산됐다. 주민들의 총의를 배신하고 불법적인 청탁을 주고받은 사업자 대표와 전임 이장은 결국, 2024년 대법원에서 징역형의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주민, 마을의 주인 노릇을 하다

동백동산을 품은 선흘1리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마을의 자연자원인 동백동산을 두고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치열하게 맞섰던 주민 200여 명은 2018년 갈등을 매듭짓고 힘을 모아 '사회적협동조합 선흘곶(이하 조합)'을 설립했다. 고제량 회장은 이를 두고 "주민들이 온전히 마을의 주인이 된 셈"이라며 박수를 보냈다. 주민들은 조합을 통해 주민 주도의 생태관광 모델을 운영하며, 동백동산의 생태적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마을의 경제적 자립 기반도 마련했다.

치열했던 갈등을 딛고, 주민들은 하나의 경제 공동체를 함께 꾸려낸 비결을 묻자, 고제량 회장은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며 웃어보였다.

가장 먼저 집중한 것은 정보의 투명한 공개였다. 주민들 사이에 오해와 불신을 막기 위한 적극적 대응의 일환이었다. 개발의 장단점과 법적 절차의 허점 등 모든 정보를 주민 전체에게 공유했다. 물론 초기에는 주민 참여가 저조했다. 그래서 마을회관에서 기다리는 대신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 등 기존 마을 조직을 직접 찾아갔다. '찾아가는 주민설명회'를 열어 주민들이 편안한 자리에서 정보를 접하고 질문할 수 있게 했다.

아울러 가급적 주민 모두에게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한 테이블당 원탁회의 규모는 10명 이내의 소규모 인원으로 제한했다.

토론 과정에서 이견 또는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드러내 공론화했다. "그러다 갈등이 격화되면 어떡하나"라고 우려하자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지역 주민들과 함께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져왔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고제량 회장과 마을주민들은 2010년 동백동산이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후, 주민역량강화 사업의 일환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주적 의사결정을 일상처럼 경험한 주민들은, 이를 통해 공동체 변화를 이끌어낼 단단한 내공을 쌓아갔다. 수동적인 참여자가 아닌 마을의 주체로 거듭나며, 참여와 숙의의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원탁회의. 고제량 회장과 마을주민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 중이다. 고 회장은 "답을 정해놓지 않았다"며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모두에게 마이크를 쥐어줬다"고 말했다.
마을주민과 함께하는 원탁회의. 고제량 회장과 마을주민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토론 중이다. 고 회장은 "답을 정해놓지 않았다"며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모두에게 마이크를 쥐어줬다"고 말했다. ⓒ 고제량

또한 "정확한 정보만 공유되고 많은 주민들만 참여한다면 판을 엎을 만큼 갈등이 커지지는 않는다"면서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까지구나' 하는 현실적인 공감대를 주민들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게 만든 사회적협동조합 선흘곶은 동백동산 습지센터 운영을 위탁받는 한편, 주민이 직접 해설사로 참여하는 생태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해 마을의 중요한 수입원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수익으로 동백동산을 가꾸는 것은 물론 어르신 생일 선물과 마을 주요 행사를 지원하고, 앞으로 마을이 돌보는 요양원을 설립하려는 계획도 품었다. 마을이 친 자연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발전하고 있는 것에 맞춰 폐교 직전이던 학교에도 100명이 넘는 아이들의 소리로 본교 승격 등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조합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만드는 '관광 수익 → 주민 복지 → 환경 보전'식 선순환 구조와 대안 앞에 "개발이 아니면 안된다"는 낡은 논리는 설 자리를 잃었다.

 곶자왈에서 생태관광 가이드를 펼쳐보이는 고제량 회장(왼쪽에서 세번째)
곶자왈에서 생태관광 가이드를 펼쳐보이는 고제량 회장(왼쪽에서 세번째) ⓒ 고제량

가장 큰 '이문'을 지역에 남기고 싶다

고제량 회장이 말하는 해법은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모든 주민이 토론에 참여하며, 갈등을 통해 공동의 합의점을 찾아가는 원칙은 활동가라면 누구다 알고 있는 기본일 거다.

하지만 그 당연한 원칙을 현실로 만드는 데는 15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고제량 회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흘곶 사회적협동조합을 가리키며 "그래도 최소 10년 이상은 지역에서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민과 함께 생활하며 신뢰를 쌓고, 갈등을 통해 공동체가 자라는 걸 돕는 일은 단시간에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래 걸리지만 만들기만 해 놓으면 이게 더 남는(?) 장사일지도 모른다"고 고제량 회장은 설득한다.

"뭐가 그렇게 많이 남느냐"고 묻자 고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사람이죠(웃음). 사람만큼 크게 남는 장사가 어딨어요."

행정의 압박으로 고 회장이 제주 람사르 습지도시 지역관리위원장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10년간 신뢰를 쌓아온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의 강력한 저항은 고립될 뻔한 싸움의 흐름을 바꿨다. 고제량 회장의 거취문제는 제주도를 넘어 국회 국정감사까지 이어졌고, 결국 그는 위원장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를 지켜낸 것은 다름 아닌, 그가 10년 동안 함께 지켜내고자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셈.

 2020년 10월 국정감사현장에서 고제량 회장(오른쪽). 이 자리에서 고제량 회장은 본인에게 제주 람사르 습지도시 지역관리위원장 사퇴 압력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했다.
2020년 10월 국정감사현장에서 고제량 회장(오른쪽). 이 자리에서 고제량 회장은 본인에게 제주 람사르 습지도시 지역관리위원장 사퇴 압력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했다. ⓒ 이은주 전 정의당 국회의원 유튜브

또한 그가 2년 여 동안 주민들과 함께 원탁회의를 하며 빚어낸 사회적협동조합 선흘곶은 그가 언젠가는 지역을 떠나더라도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공동체가 됐다.

그의 목표는 언제나 같았다. 언젠가 자신이 없어도, 주민들이 직접 만든 시스템 안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자립하는 것. 그런 그에게 제주 선흘리 사람들이 보여준 연대와 공동체의 힘은 고회장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과다.

 제주 조천읍 습지에서 생태관광에 나선 시민들과 함께하는 고제량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제주 조천읍 습지에서 생태관광에 나선 시민들과 함께하는 고제량 회장(왼쪽에서 두번째). ⓒ 고제량

"제대로 된 조직 하나를 만드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 사람들을 엮어내고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한다면, 저같은 사람들은 이제 다소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는 거죠. 활동가가 떠나도 스스로 잘 유지되는 공동체를 보며 우리도 비로소 한숨을 돌리게 되니까(웃음). 힘들겠지만 우리 조금만 더 버텨봅시다."

기사에 다 담지 못한 고제량 회장의 이야기는 오는 11월 6일 비영리활동가학교 '엣지'에서 공개된다. 자연과 마을을 지켜낸 공동체 운영의 원리를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엣지가 준비한 온라인 교육 '엣지 ON-활동의 정석'(https://activistcampus.org/basicsofactivism)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연희문고에도 실립니다.


#제주#동백동산#거문오름#민주주의#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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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연희문고 정재훈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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