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오름의 안내도. 탐방하는데 두어 시간 정도 걸린다. ⓒ 전갑남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고 깊은 한라산(해발 1947m)! 제주도엔 한라산의 아우들이 오름이란 이름으로 곳곳에 분포한다. 고만고만한 오름이 360여 개나 있다. 너른 제주 산하에 점점이 놓인 작고 낮은 오름들이 왕국을 이룬 것이다.
화산 폭발로 생긴 신비로운 땅 제주도. 지질학자들은 흰죽이 바글바글 끓으면서 터져 굳어진 것처럼 한라산이 폭발할 때 기생화산인 오름들이 올망졸망 형성되었다고 한다. 오름은 나지막이 엎드려서 만지면 말랑말랑할 것 같다. 선과 선이 만나 이룬 조화가 온화한 모습이다.
제주민의 삶과 함께한 오름은 뭇 생명의 서식처이고, 지하수 함양지로 목축의 근거지가 되었다. 4.3 당시에는 수난을 겪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오름에 오르는 것은 제주를 가장 가까이 느끼기에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의 입구. 다랑쉬오름은 해발 382m, 비고 220m로 화산체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전갑남
여름이 아직 꼬리를 내리지 않아 후끈후끈한 열기가 남아있는 제주. 지난 9월 11일 수많은 오름 중 '오름의 여왕'이라 부르는 다랑쉬오름에 아내와 함께 올랐다. 구좌읍 중산간 지역에서 가장 높고 여러 오름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다랑쉬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위엄과 균형미를 갖춘 오름 중의 오름이라는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11년 다랑쉬오름을 오름 랜드마크로 지정하였다.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 전갑남
초입부터 산길이 잘 닦였으나 가파른 계단에선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비 온 뒤끝이라 습도가 높고 후끈한 열기에 땀이 줄줄 흐른다. 높이가 낮은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막을 만들어 주어 그나마 다행이다. 지그재그로 놓인 산길을 얼마 걷지 않아 확 트인 전망이 펼쳐진다. 눈이 다 시원하다. 바람까지 불어주어 상쾌하다.
산 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내가 힘은 들어도 즐거운 기색이다. 다행이다.
"발 아래 펼쳐지는 초록초록한 산하가 정말 맘에 드네. 오름들의 곡선들이 부드럽게 이어주는 것 같고! 서로를 받쳐주는 아름다움이 있어!"

▲다랑쉬오름에서 본 아름다운 제주 산하. 아끈다랑쉬오름을 비롯한 여러 오름들과 성산일출봉과 우도까지 한눈에 보인다. ⓒ 전갑남

▲오름에 오르다 쉼터에서 제주 산하를 내려보는 풍광이 참 아름답다. ⓒ 전갑남
아우뻘 되는 아끈다랑쉬오름이 코앞에 버티고 있다. 저 너머 성산일출봉, 우도도 모습을 드러냈다. 제주의 목가적인 푸르름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넋 놓음에 빠진다.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셔 본다. 제주의 공기는 다른 맛이 느껴진다.
정상의 풍광은 어떤 모습으로 우릴 맞아줄까? 줄줄 흐르는 땀을 훔치며 있는 힘을 다해 발을 옮긴다. 파란 하늘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조금만 오르면 손에 닿을 듯싶다.
여기서부터는 깊이 110m의 굼부리가 보여야 하는데, 나무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억새들이 춤추며 반긴다. 가을이 여물어가면 바람의 손길에 억새는 몸을 흔들며 노래하리라. 더 멋진 풍광을 보여주려는 은빛 물결이 눈에 그려진다.
산불감시초소가 보인다. 흠씬 젖은 몸을 한 줄기 바람이 씻겨주고 말려준다. 지금까지 수고를 보상해 주는 것 같다.
"와! 정상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저기가 한라산 백록담 아냐?"
망망한 푸른 바다를 보면서 한라산을 응시하니 시선이 닿는 곳마다 자연의 충만이 가득하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자연 경관, 푸르른 밭, 사람 사는 모습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삶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다랑쉬오름의 분화구. 깊이가 110m이고, 둘레 길이가 1.5km이다. ⓒ 전갑남

▲분화구 주위는 억새가 군락을 이뤄 자라고 있다. 풍광이 참 아름답다. ⓒ 전갑남
와, 이게 굼부리라는 분화구인가! 발아래 푹 꺼진 분화구가 눈을 의심케 한다. 거대한 분화구가 장난이 아니다. 누군가 일부러 파 놓아도 이렇게 완벽한 형태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동그란 형태가 신기하다. 다랑쉬오름 분화구는 달이 떠오른 것 같아서 월랑봉(月郞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랑쉬오름 분화구 둘레길만 1.5km 남짓. 도보여행의 묘미는 지금부터다. 오름을 오를 때와 달리 분화구를 따라 걷는 재미가 마치 하늘의 숲을 걷는 신선이 된듯한 기분이다. 둥근 선이 닿는 곳마다 자연의 충만함이 내 몸을 감싸주는 신비감에 휩싸인다.

▲분화구에서 분출한 화산쇄설물에 대한 설명 간판. 화산송이가 바닦에 깔려 화산체 화산임을 보여준다. ⓒ 전갑남
분화구 탐방로에 정말 붉은색 돌들이 밟힌다. 제주 사람들이 화산송이라 부르는 스코리아(Scoria)이다. 그 옛날 화산이 폭발하면서 주변에 차곡차곡 화산 쇄설물이 떨어져 만들어진 것들이다. 밟히는 소리도 색다른 느낌이다.
분화구 주위 소사나무 군락이 푸름을 더해주고 있다. 이곳에는 절굿대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과 많은 산새와 노루가 서식하며 오름 생태계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382m의 다랑쉬오름을 쉬엄쉬엄 오르고, 분화구 둘레를 탐방하는 데 2시간 남짓. 여름날 만만치 않은 산행이다. 마음은 육지 산행 1000m 고지를 점령한 감격을 느껴본다.
다랑쉬오름의 아름다움 뒤에 남아있는 아픔
제주만의 특별한 풍광인 오름에 올라 만끽하는 기분. 싱그러운 풍경에 반하고, 군데군데 핀 야생화에도 반하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오름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산은 높지 않아도 좋다. 크게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자연이 내어준 대로 느끼고 기대며 의지할 수 있다면, 자연의 한복판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랑쉬오름 인근에 4.3유적지 다랑쉬굴이 있다. 수난의 제주 역사를 느낄 수 있다. ⓒ 전갑남
다랑쉬오름에도 제주의 아픈 역사가 있다. 여기도 제주 4.3 당시 구좌읍 하도리, 종달리 주민 11명이 다랑쉬굴로 피신을 왔다 희생되었다. 유골이 이곳 다랑쉬굴에서 발견된 것이다. 자연이 준 아름다움 이면에 깊은 상처로 슬픔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다랑쉬굴의 연가 / 강덕환
그해, 어둠 속 마그마로 분출한 것은
끝끝내 밝히고야 말 역사의 몸부림이었으니
탯줄 사른 서러운 땅 마흔네 해 만에
바람으로 구름으로 우리들 곁으로 오시었으니
헤갈라진 마음들 추슬러 고르고 다독인 자리
뿌리 뻗고 가지 드리워 새 생명의 빛살로
이제랑 타오르십서 살아오십서
아름다움과 함께 제주의 아픈 상처까지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내어준 다랑쉬오름. 제주도만이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자연유산으로 길이길이 잘 보존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10일(수)부터 9월 16(화)까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인천in에도 동시 송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