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공동체사업단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조용숙(90)·구문임(76) 어르신(사진 왼쪽부터). 구문임 어르신이 장금이들이 만든 전통된장을 용기에 담는 모습을 보여주신 후 활짝 웃고 있다. ⓒ 유창재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보기에는 '인생 다 살았지'라고 할 거다. 나도 그땐 그랬으니까. 하지만 (노인일자리에 참여한)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너무 좋다."
추석 명절을 일주일 앞둔 지난 9월 30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만난 구문임(76)씨는 우리 전통 식문화인 '장 담그기'를 통해 인생 2막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30년간 국무총리실에서 공직자로 일하며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은퇴 후 쉬는 것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2~3년 지나니 좋았던 마음도 시들해졌고, 소개를 받아 노인복지관을 찾게 됐다. 처음 참여한 노인일자리가 '종로&(앤)장금이'다.
이 일자리는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2013년 노인자원봉사단으로 처음 시작했다. 어르신의 전통장에 대한 지혜와 경험을 다양한 세대에 전승하고 확산하는 공동체사업단 사업이다. 2017년 복지관 증축 때 현재 장체험관과 카페 공간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인 일자리사업에 진입했다. 2023년부터 시장형 일자리로 확대하고 있다.
현재 20명의 장금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하루 4시간 일주일에 이틀을 기본으로 한다. 바쁠 때는 시간을 넘겨 일하기도 한다. 임금은 시급 1만300원을 기준으로, 최저 35만 원에서 시간을 초과할 경우 40만 원 전후를 받는다.
"자식들도 커서 (독립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 총리실에서 일할 때 너무 많은 일로 고생했다. 직장 다닌다고 친정 엄마가 다 해줘서 먹을 줄만 알았다. 처음엔 장 담그는 일이 굉장히 어려웠지만 지금은 아주 잘하고 있다. 장 담글 때마다 엄마가 생각나서 죄송하다."
구씨의 말에선 '은퇴가 인생의 끝'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들었지만 일할 의지만 있다면, 자신에게 맞는 일을 배우고 시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체 인구 20% 고령인구... 노인일자리 성공사례 된 '종로&장금이'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공동체사업단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조용숙(90)·구문임(76) 어르신(사진 왼쪽부터). '종로&장금이'의 주무대인 복지관 5층 장독대에서 전통장이 담긴 장독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유창재
통계청이 전날(29일) '2025 고령자 통계'를 발표했다. 올해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20.3%에 달하는 1051만4000명이라고 한다. 이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음을 확인하는 결과다. 달리 생각하면 새로운 '노년' 노동 자원이 배출되는 것이다.
'장 담그기'는 지난해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2013년 김장문화에 이어 두 번째다. 노년이 잘할 수 있는 '종로&장금이'는 노인일자리 사업에 새 길을 제시하는 성공사례가 됐다.
제1대 장금이로 13년째 참여 중인 조용숙(90)씨에게 더 이상 노년은 잿빛 미래가 아님을 볼 수 있었다.
"음식을 좋아하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 참여하게 됐다. 장 담그는 법은 시어머니로부터 전수 받았다. 복지관에 와서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봉사도 하고, 수업도 받고, 안 해본 게 없다.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도전하고 또 도전하고..."
그의 도전은 놀라웠다. "지금 나이가 있지만 드럼도 배우고 있다. 치매도 안 오고 너무 즐겁다. 마음 자체가 즐거우니, 활력도 생긴다"며 "실버(시니어) 모델도 한다. 내 주변에 복지관이 있는 게 '노인들의 천국'이다. 마음도 젊어진다"고 말했다.
올해 아흔인 그가 '드럼', '모델'이란 단어를 말할 때 눈빛은 반짝였고 표정은 밝았다. 끊임 없는 도전의 삶이 주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구현동화도 5~6년 했다. 당시 나이가 70대였는데, 어린이집 사업이 없어지면서 봉사 활동을 해왔다"며 "우리 애들이 그런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하세요'라고 하지만, 복지관에 오는 게 너무 즐겁다. 여기 아니면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라고 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 함께 만들고 나누는 '장 담그기'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공동체사업단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조용숙(90)·구문임(76) 어르신이 전통장을 보여주고 있다. ⓒ 유창재
인생 1막을 끝낸 노년을 능력 있는 노동자로 빛나는 제2 인생으로 살게 하는 노인일자리 기획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더구나 서울 도심 속에서 전통장을 만드는 일을 생각해냈을까.
정수란 종로노인종합복지관 과장은 "종로구 특징은 문화재가 많아 전통미가 있고, 대기업도 밀집해서 현대적인 모습도 갖추고 있다"며 "두 가지가 공존하는 역사 도시 종로 한가운데서, 우리가 전통문화를 직접 전수해보자,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취지에서 장금이 사업이 처음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안내를 받아 장금이들의 주무대인 복지관 5층 장마당을 둘러봤다. 눈에 들어온 것은 100여 개의 윤기 흐르는 장독들이었다.
정 과장에 따르면 50년간 장을 담아온 어르신들이 전통 방식을 고집해서 장을 담근다. 이 때문에 대량 생산이 아닌 1년간 천천히 숙성시킨 한정판 장을 생산한다. 음식의 뿌리인 '장'을 어르신들이 직접 후손들에게 전수한다는 가치 또한 담겼다. 처음에는 어르신들마다 손맛이 달라 장맛의 표준화를 위해 장 전문가 등과 함께 종로&장금이만의 레시피도 만들었다고 귀띔해줬다.
올해 목표는 인재육성 시스템을 통한 신노년 일자리 확대라고 한다. 2023년 처음 문을 연 취업교육인 '장금이학교'를 통해 전문성과 역량을 강화 교육을 한다. 첫해 15명, 다음해 20명의 장금이를 양성했다. 올해 11월에 세 번째 교육 예정이다. 또 장체험 요리클래스 신규 코스를 개발하고, 어린이집 대상으로 찾아가는 장금이, 서울시민 대상 장독분양사업 등을 진행한다. 현재까지 전통장 프로그램에 4423명이 참여했다. 이 모델을 4곳에서 배워갔다.
된장과 고추장, 간장 등을 판매해 상당한 매출도 올렸다. 전통된장 1통(500g) 가격은 9000원, 찹쌀고추장은 1만2500원이다. 2023년 디지털 커머스 사업에 도전해 연 180만 원의 매출을 냈다. 이후 홍보 활동을 적극 한 결과, 지난해 약 1억1000만 원을 달성했다. 올해는 월 100~400만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번 추석 때 4000만 원 정도의 선물세트 주문이 들어와 완판 되는 등 지난해 연매출을 웃돌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노하우를 담은 <장금이의 장맛>이란 책도 내놨다.
이는 시니어 장금이들이 고령화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바꿔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능력 있는 노동자로 인생 후반기를 정체기로 보내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인생 황금기의 연속이다.
한편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은 정관 스님(관장)을 비롯해 46명이 종사하고 있다. 노인맞춤돌봄 생활지원사 40명도 있다. 등록 회원수는 1만3971명이며, 60세 이상 종로구민의 33.4%가 등록돼 있다. 여성(62.4%)이 남성(37.6%)보다 많다. 70대(41.3%)와 80대(32.7%)가 주로 활동한다.

▲종로노인종합복지관 5층에 있는 장카페. 이곳에서 '종로&장금이' 노인일자리를 통해 1년간 숙성시켜 만들어진 전통된장, 찹쌀고추장 등이 판매되고 있다. 현재 진열장에 있는 상품은 이번 추석 명절 선물로 예약 주문이 완료된 제품들. ⓒ 유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