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30일 경기 양평군 용문역에서 다른 날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려 혹시나 했는데 바로 용문장이 있는 날이었다. 역사 계단을 내려갈 때 이른 아침부터 역전 거리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천막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장터를 피해 용문역 공영주차장을 가로질러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장날이서인지 아침부터 문을 연 식당들이 많았다.
다행히 버스정류장은 장터에서 벗어나 있어 사람이 많지 않았다. 잠시 후, 홍천 가는 120번 버스가 도로를 점령한 차량들을 비집고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먼저 지나간 버스에는 통학생들이 많아 서서 갈까 내심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그 버스는 한산했다. 현장 작업자로 보이는 조끼 입은 노인 두 명과 촌부 몇 명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홍천 쪽으로 가는 사람이 의외로 적었다. 하긴 아침 녘 농촌버스는 항상 그러긴 했다.
하루 종일 흐리다고 했다. 오후엔 소나기까지 온다고 했는데 장담할 수 없다. 새벽안개가 걷힌 듯, 짙은 구름이 높지 않은 야산 봉우리를 덥고 있었다. 버스는 광탄리 흑천 변을 지나 단월로 달리고 있었다. 왠지 차갑게 보이는 흑천 주변에 노랗게 영근 논들이 펼쳐져 있고, 천변을 따라 산만하게 자리 잡고 있는 농가와 펜션들도 여름을 접고 이미 가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풍경을 감싸고 있는 산등성이도 이미 녹색을 벗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룡리를 지난 버스는 홍천 길에서 갈라져 용두리로 들어갔다. 용두리는 청운면 읍내이다. 버스는 용두리버스터미널에 나를 부려놓고 다시 홍천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읍내는 한산했다. 오래전에는 군영과 저작거리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삼성리에 금광이 발견되어 흥청거렸다고 한다.

▲2025년 9월 30일. 여물리 ⓒ 안호용
9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검은색 패널로 지은 조그만 터미널 건물을 지나 우측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 읍내를 빠져나왔다. 곧바로 흑천 여물교를 건너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흑천을 사이에 두고 용두리와 여물리로 나뉜다.
2차선 도로는 마을을 지나 여물천을 따라 통골고개 능선부 깊숙한 곳으로 이어진다. 300~400미터의 산줄기가 구름에 잠겨 성처럼 그 길을 둘러싸고 있다. 바람은 없지만 다소 찬 공기가 한적한 도로에 감돌고 있었다. 마을 초입 논에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벼이삭이 머리를 잔뜩 숙이고 있고 어떤 놈들은 아예 허리까지 구부리고 있다. 나는 그 풍경 속으로 잰걸음질로 들어갔다.

▲2025년 9월 30일. 통골고개 가는 오름길 ⓒ 안호용
도로 옆으로 농가들이 바특이 접해 있는데, 여물리 인구가 거의 모여 있는 것처럼 특이하게도 농가들이 밀집되어 있다. 청운면이 흥할 때 읍내와 한 축을 담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 마을길을 따라 듬성듬성 서있는 벚나무는 때이른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다.
마을 곳곳 텃밭엔 빨갛게 익은 고추가 마지막 생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고, 들깨는 금방이라도 씨를 터트릴 듯 냄새를 뿜어대며 여물어 가고, 콩잎도 갈변을 시작하면서 콩깍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렇게 심어놓은 호박넝쿨도 둔덕을 기어 나와 길가로 호기롭게 뻗치고 있다. 조만간 낙엽이 질 때면 머리만 한 호박이 정체를 드러낼 거다.
마을을 지나 도로를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여물천 뚝방 길로 접어들었다. 물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 사이로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불청객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산기슭 황금색 본답을 지나자 냄새와 더불어 오른쪽 수수밭 너머로 허름한 우사가 보였다. 우리 안에서 한 녀석이 나에게 시선들 두고 무심하게 여물을 씹고 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움도 잠시 후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넓따란 들깨 밭을 지나자 농가가 보였는데 그 집 입구 길가에 황구가 시야에 들어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에게 점점 다가가자 나를 노려보고 있던 녀석은 드디어 짖기 시작했다. 거리가 짧아질수록 소리는 더욱 커졌다. 녀석도 내가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그냥 보내주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최대한 침착하게 녀석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쓰며 정면을 보고 지나칠 때 줄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녀석은 거칠게 거품을 물었다. 덩달아 집 마당에 있던 새끼 강아지도 짖어댔다. 그럼에도 십여 미터 멀어지자 이내 잠잠해졌다. 드디어 불청객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바탕 폭풍은 지나가고 다시 평화의 공간이 열렸다. 닭 여러 마리가 내 발치를 지나쳐 개울 둑 아래로 태연하게 이동하고, 닭장 안을 보자 아직도 한 마리가 남아 나를 본체만체 머릿질을 하고 있다. 닭똥 냄새가 진동했다.
이제 마을과 작별을 할 시간이다. 산으로 난 길로 접어들자 멀리서 마지막으로 개 짖는 소리가 합창으로 들려왔지만 곧 사라졌다. 동네 개들이 불청객을 몰아낸 기념으로 하이파이브를 하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갈라진 길은 산허리를 타고 경사를 높이며 깊숙이 들어간다. 마을 풍경은 기억에서 멀리 사라지고 나는 산길 풍경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 나를 반겨준 것은 매미소리였다. 짝짓기를 하기 위해 매미들은 그렇게 하염없이 처연하게 울어대고 있었다. 온 산을 점령한 그 소리 사이로 귀뚜라미 소리가 바리콘으로 추임새를 넣고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벌레 소리도 간혹 보조를 맞추었다. 그 많던 새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을에도 야생화는 생명의 마지막 자태들 드러낸다. 갈변하는 냄새가 흩날리는 가운데서도 누린내풀, 구절초, 나도송이풀, 닭의장풀 등이 보라색 하얀색 노란색 파란색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 숲은 생의 한 시절을 마감하고 있지만, 가을 야생화는 작지만 확실하게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화려한 것도 아니다. 소소하게 작은 무리를 짓고 있을 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숲길 한편에서 수줍음을 머금고 산객을 호객하지만, 관심을 두지 않아 미안하기도 하다.
숲길은 산허리를 굽이쳐 올라 능선부에서 다시 다른 골을 따라 깊이 이어진다. 주변 숲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자연림이어서 나무들이 제멋대로 웃자라 있고 수령도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오동나무였다. 사람이 식재를 했는지 모르지만, 수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오동나무들이 숲길 곳곳에 사람 얼굴 만 한 이파리를 늘어뜨리고 기괴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이 숲을 지키는 사천왕상같기도 하다.

▲2025년 9월 30일. 통골능선 숲길 ⓒ 안호용
능선 마루금에 오르자 이제부터는 거의 경사면 없이 능선길이 계속된다. 이 길은 등산객이 종종 찾는 경기지맥의 일부이기도 하다. 산상만찬을 하고 다시 걷는다. 한동안 머리 위에 떠있던 송전선도 사라지고 두 발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매미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해발이 높아지자 구름에 잠겨 있었던 탓인지 정오가 지났는 데도 숲은 아직도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가을 아침 녁에 산길을 걷다 보면 수풀에 맺힌 이슬로 인해 등산화가 젖기도 한다. 심할 때는 양말까지도 젖어 때 아닌 우천 트레킹을 하는 것처럼 애를 먹기도 했다. 가다 보니 이슬을 머금고 있는 솔잎 사이로 희미하게 거미줄이 보였다. 젖은 숲에서 거미는 활개를 친다.

▲2025년 9월 30일. 밭배고개 옛길 ⓒ 안호용
그렇게 가을에 물들기 시작한 숲길을 따라 12킬로미터를 걸으면 밭배고개와 만난다. 양평 부안리에서 명성리를 잇는 옛 고개이다. 발 아래는 단월명성터널이다. 나는 잠시 그 분기점에서 숨을 고르고 부안리 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중형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도로엔 이미 수풀이 거의 반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 텅 빈 길을 가다가 한 무리의 바이크 라이더들이 지나가면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공기 좋은 곳에 매연을 뿜어대며 가는 행위에 대한 죄송함이 내포된 그들만의 표현이었다.
이제 14 킬리미터의 트레일이 끝나 가고 있었다. 밭배고개를 내려서면 명성리로 넘어가는 신도로와 만나다. 거기서 더 가면 설악면이 나오고 더 가면 유명산과 청평이 나온다. 아직도 버스가 오려면 한참 남았다. 나는 큰길로 나가기 전에 옛길 한편에서 한 시간 가까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 후 버스정류장으로 내려갔다.
항상 그렇듯, 아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나는 홀로 버스를 기다렸다. 지나친 가을 숲길 풍경이 가물거렸다. 멀리 달아나는 기억을 하나하나 잡아와 다시 그려보고 짝을 맞추었다. 간혹 자동차들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매미소리가 꿈처럼 사라져 들리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