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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시니어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어요. 수업을 통해 느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수업이 시작되면 어르신들은 조심스레 손글씨 원고를 꺼내신다. 낡은 봉투, 반으로 접힌 A4용지, 작은 수첩에서 꺼낸 쪽지까지 각양각색이다. 그중 한 분이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나는 속기사처럼 자판 위를 분주히 움직인다.

이메일로 보내는 분도 계시고, 메시지로 보내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손으로 직접 써오신다. 수업 전에 내가 얼른 타자를 치거나 낭독 중간 중간을 따라 쓰면서 '현장 속기'를 하기도 한다. 행여 문장이 너무 길어지거나 같은 말이 반복될 땐 타자 치며 조심스럽게 줄이기도 하는데 이런 과정을 지켜본 분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글이 점점 단정해지는 경우도 있다.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이면지에 글을 쓰는 어르신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면지에 글을 쓰는 어르신 ⓒ 최은영

지난주 수업이었다. 한 어르신이 부모님 제사를 모신 이야기를 써오셨다. 속기사 모드로 자판을 따라가다가 "제찬을 진설했다"는 구절에서 잠시 멈칫했다. 문맥 상 제찬은 제사 음식, 진설은 그것을 차리다라는 의미일 테지만 낯선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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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이 끝난 후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여쭤보니, 글을 쓰신 분은 물론 다른 어르신들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릴 적 자주 들었던 말인데 요즘엔 잘 안 쓴다며, 선생님은 아예 처음 들어보느냐고 되묻기도 하셨다.

"친할머니는 산 사람만 잘 살자고 해서 제사를 안 지내셨고요. 외가는 제가 아주 아기일 때까진 했는데, 할머니가 없앴대요. 그래서 저는 제사상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내 말을 듣고 한 어르신이 단번에 정리해주셨다.

"우리 선생님은 제수진설, 제찬진설 다 본 적 없겠어."

그랬어도 본 적 없는 상차림이 단어 하나로 눈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진설... 말이 풍기는 풍경

본 적은 없어도 '진설하다'라는 말은 참 예쁘게 느껴졌다. 찾아보니 陳(진)은 펼치다, 늘어놓다이고, 設(설)은 차리다, 베풀다였다. 합치면 '펼쳐 차리고 베풀다'쯤 되는 말인데, 나는 '진'에 진심, 정성, 진중함 같은 뜻이 있을 줄 알았다. 단순히 늘어놓는다는 뜻이라니 의외였다. 하지만 단어가 실제로 쓰이는 자리는 단순한 배치가 아니었다. 진설은 제사의 격식과 마음가짐, 곧 의례적 정중함을 담고 있었다.

'진설하다'라는 말에는 단정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오래된 나무집 안방처럼 고요해서 마음까지 조용해지는 느낌이었다. 글을 타이핑하면서도 그 단어에 몇 번이고 눈길이 갔다. 사라진 말은 보이지 않게 마음속에 남기도 하는 모양이다.

'진설하다'를 처음 들은 날 머릿속에 떠오른 또 다른 말이 있었다. 바로 "음식을 낋여오너라"이다. 몇 달 전 유행했던 '밈'인데, 중학생 큰아이 덕분에 나도 알게 됐다.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으나 패러디 한 여러 밈을 보며 이걸 처음 만든 사람은 진짜 머리 좋다고 아이와 얘기했던 게 기억났다. 그랬어도 그 말은 의미보단 억양이 먼저였고, 전달보단 소비가 빨랐다. 웃고 나면 이내 잊혀졌고,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을 말은 아니었다.

말을 차리는 마음

'진설하다'와 '낋여오너라'. 둘 다 음식과 관련된 말이지만 참 다르다. 하나는 음식을 조용히 차려놓는 정성의 언어였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끌고 오는 즉흥의 말이었다. 하나는 오래된 품을 느끼게 했고 다른 하나는 빠르게 웃고 지나가는 유행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이렇게 써왔던 걸까.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수단이었던 말이 언젠가부터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장난처럼 변해갔다.

밥상을 차릴 때의 마음과 말을 건넬 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같아야 한다. 밥을 짓기 위해 물을 붓고 불을 조절하며 한참을 기다리듯 말도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천천히 데우고 조심스럽게 덜어내야 한다. 진심은 대체로 느리게 완성되기에 시간이 든다는 걸 우리는 알면서도 자주 잊고 산다.

요즘은 나도 모르게 말을 서둘러 내뱉는 일이 많아졌다. 카카오톡 창에 문장을 쓰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은 짧은 이모티콘 하나로 끝내기도 한다. 그런 나를 돌아볼수록 더 '진설된 말'이 그리워진다. 차린 음식은 먹는 이를 배려하고 잘 다듬은 말은 듣는 이를 향한다. 말은 그저 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모양이다. 급히 덜어낸 음식이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 듯 준비 없이 내뱉은 말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진설하다'라는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 말이 가진 고요함과 정성의 결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내 글에도 그 단어를 쓸 수 있을 만큼 단정한 문장을 쓰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마음 앞에 말을 진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말 한 상을 조심스럽게 차려내듯, 오늘도 나의 문장을 가만히 펼쳐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시니어글쓰기#복지관글쓰기#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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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풀면 책 한 권(내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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