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

▲서울 호텔신라 ⓒ 호텔신라
정부 압박으로 중국에 통째 대관하게 되는 바람에 기존 예약자들이 인륜지대사인 혼인 예식을 못하게 됐다는 소식이 지난달 21일 보도됐다. 호텔신라는 '국가 행사' '사익이 아닌 국익을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야당은 '정부가 예식까지 취소시켰다'고 진상규명을 벼르지만, 정부는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상태.
오는 31일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하게 되면서 미·중 정상회담이 국내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커졌다. 때맞춰 중국 측이 서울신라호텔을 통째로 빌리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연합뉴스TV>는 지난 21일 단독 보도로 "호텔신라 측은 최근 일부 예약자들에게 '11월 초 국가 행사가 예정돼 있어 부득이하게 예약 변경 안내를 드리고 있다'며 예식 일정 취소 사실을 통보했다"라고 보도했다. 또 "정부의 공식 요청에 따른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설명도 덧붙인 것으로 파악됐다"라고 보도했다.
갑작스러운 연회장 및 객실 예약 취소에 날벼락을 맞은 이들의 당혹감과 이에 공감한 시민들의 분노가 여러 매체들의 후속 보도로 전해졌다. 호텔신라는 "국가 행사로 기존 예약 고객들께 예약 변경, 취소 안내를 드린 게 맞다. 계약서에 관련 내용이 있다 해도 당황스러울 고객을 위해 개별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라며 "호텔 사익을 위한 일방적인 취소가 아닌 국익을 위한 조치였던 만큼 고객들의 너른 양해 부탁드린다"라고 해명했다(<세계일보> 9월 22일 보도).
야당인 국민의힘에서는 규탄이 터져나왔다. 주진우 의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국가 행사를 위해 개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독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유상범 의원은 "국민을 희생시킨 친중 굴종"이라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개입해 국민의 권리와 일상을 외면하고, 중국 공산당에 과도하게 예속된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날을 세웠다.
하지만 정부에선 납득할 만한 해명이 나오지 않았다. 외교부는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업체에 문의해 보라"는 공식 의견(9월 22일)을 내놨다. 대통령실도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마치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됐다.
'할말하않' 당국자 "정부가 요청 안 했다고 말할 상황이 못 된다"
하지만 한 정부 당국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당국자는 지난달 22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우리 정부가 호텔에 얘기한 게 없다. 호텔 쪽으로부터도 '정부에서 얘기 들은 게 없다'고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대관 예약은 중국 측에서 직접 한 것이지, 정부의 어느 곳도 호텔에 미리 접촉하거나 언질을 준 게 없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호텔신라가 중국 측의 요청을 받고 판단해 한 일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요청한 게 아니라고 밝히면 되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당국자는 "그럴 상황이 못 된다"라고 답했다. 기자는 '중국이 한국에서 큰 외교 행사를 여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 한국의 입장이고 중국 측이 적절한 숙소를 확보해 행사를 잘 준비하는 게 좋으니, 이 일을 굳이 따지는 것이 외교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냐'라고 물었다. 당국자는 "잘 아시네요"라고 답했다. '중국 때문에 호텔 예약자들이 큰 손해를 보았다'는 인식이 퍼지는 게 국제적 외교 행사에 참석하는 손님을 맞이하는 한국 정부로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중국 측은 지난달 27일 대관을 취소했고, 호텔신라는 예약 취소를 알렸던 예약자에게 예정대로 예식 및 투숙을 진행한다고 알렸다. 이유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데, 중국 측 외교 활동 일정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부차적으로는 예식 취소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 자체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기존 예약자들의 혼인 예식 취소 등을 감수하면서 중국 측 대관을 성사시키겠다고 결정한 것은 호텔신라다. 5성급 호텔은 많지만, 주요 국가 정상급 인사의 숙소 및 외교 활동 장소로 사용되는 것은 호텔의 장점을 부각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금전적인 면을 따져보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호텔에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신라호텔이 말한 '국가 행사'는 중국의 국가 행사였고, 중국 대관으로 얻는 이익은 국익보다는 호텔의 사익 쪽이 크다.
하지만 호텔신라는 혼인 예식 취소 등 예약자들의 막대한 불이익에 대해서는 "사익을 위한 일방적인 취소가 아닌 국익을 위한 조치", "국가 행사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예약을 취소당하는 이들이 받아들일 만한 대안을 마련하기보다 '정부의 압박'이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 비난을 면피하는 길을 택했고, 사태는 일파만파가 됐다.
취소되나 했던 혼인 예식과 숙박이 가능하게 되면서 사태가 일단락 되나 했지만, 국민의힘은 이번 일의 진상을 국정감사를 통해 규명하겠다고 나섰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박상오 호텔신라 호텔운영총괄부사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정상급 인사들이 이용하는 호텔이 철저히 준수하는 원칙 중 하나가 '숙박객의 비밀을 철저히 보장한다'는 것. 호텔 책임자가 국정감사장에 나와 호텔리어로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고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면, 그야말로 자업자득이 되는 셈이다.
<오마이뉴스>는 1일 호텔신라에 전화해 중국 측 대관 협의 등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답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