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조사
- 한여진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에 따르면 누수의 원인은 수십 가지나 되고 또 누수라는 것은 꼭 한가지 원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이쪽에서 새던 것을 잡으니 다음날에는 저쪽에서 새기도 하는 것이라서 결국 한번 발생한 누수는 지속적으로 모두를 의혹 속에 빠뜨리고 아래층에 사는 사람도 위층에 사는 사람도 다 같이 한 마디씩 보태지만 물은 계속 흐르고 그런데 물의 성질이란 무엇인가 누수를 경험한 사람들과 누수를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렇게 흐르는 것 자기소개가 흘러가고 그때 뒤늦게 누수를 잡으려는 사람이 합류하고 어딘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동안 안이했던 거죠 모두가 누수를 잡기 위해 공동주택을 샅샅이 뒤지고 있는 그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이곳은 참 조용하군요 원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몰려든 사람중 누군가 울고 있었다
* 법률나무, [공동주택 건축불량 아파트 하자보수 판결문], 서울문학, 2021.
출처_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
시인_한여진 : 2019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가 있다.

▲습한 숨결이 복도 바닥을 따라 번져 있다.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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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한 일에 항변할 때 마주하게 되는 판결문은 콘크리트처럼 견고하다. 설핏 완벽해 보인다. 실상은 다르다. 군데군데 금이 가 있다. 그 사이로 물이 샌다. 실제로 누수를 잡기란 쉽지 않다.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슬픔 또한 건물 사이로 흐르는 물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지만 어느샌가 빈틈을 비집고 나와 마음에 스며든다. 당신의 성긴 마음의 틈을 잠시나마 이 시로 메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경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