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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1 11:37최종 업데이트 25.10.01 11:37

두부 한 모에 담긴 삶의 무게

자식 짐 되기 싫어서...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전철역 앞 두부를 파시는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처음 그 모습을 본 건 수년 전 일이다. 지나가다 두부 사면서 한두 마디 나누던 것이 어느새 "비 올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요즘 손님 많아요?" 같은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새벽 네 시면 일어나요. 안 그러면 시간이 모자라서..."

어느 날 아주머니가 말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커다란 스테인리스 솥에 불을 지펴 콩을 끓인다. 최근에는 기계의 도움을 받아 수월해졌다며 웃으시지만, 여전히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와 거칠게 갈라진 손등은 콩물을 거르고 묵을 쑤는 모든 과정에 스며든 수십 년의 노동을 말해준다. 여름이면 뜨거운 김이 얼굴을 때리고, 겨울이면 찬물에 손을 담가 콩을 씻어내는 지난한 세월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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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세요?" 어느 날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혼자가 편해요. 남편은 진작 세상을 떠났는데, 사실 있을 때도 도움이 안 됐어요. 돈만 있으면 술부터 사러 가고 ..." 담담한 목소리에서 원망보다는 체념이 묻어났다.

팔 남매 중 원치 않는 딸로 태어나 학교는 당연히 못 갔고 환갑이 넘어서야 한글을 깨쳤다. 결혼도 입 하나 덜려고 한 거였는데, 막상 시집을 가보니 밥 굶는 것은 예사였다. 남편은 동전 한 닢만 생기면 술값으로 써버렸고 아주머니는 아이 먹을 젖이 안 나와 대책이 없었다.

"갓난애를 업고서라도 일을 나가야 했어요. 품팔이하다 밥 한 끼 얻어먹게 되면요, 혼자 목에 넘길 수가 없더라고요. 싸 들고 와서 애들 먹였죠."

너무 힘들어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눈에 밟히는 아이들 생각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애들은 굶기면 안 된다. 어떻게든 공부는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틴 세월이다.

지난 장마철 얘기를 하셨다. "비 오는 날은 두부가 안 팔려요. 새벽에 힘들게 만들었는데..." 하루 종일 손수레를 덮고 앉아 빗방울을 피했다. 여름엔 땀이 비 오듯 쏟아져도 자리를 뜰 수 없고, 겨울엔 손끝이 갈라져도 찬물을 만져야 한다. 가장 두려운 건 단속이다. "한 번 걸리면 그날 새벽부터 일한 게 다 날아가요. 그럼 그냥..." 말끝을 흐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눈물이 울컥 솟는 날이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 등이 2022년 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노점 운영자 96.2%가 코로나19 이후 소득이 감소했고, 35.8%는 단속 때문에 장사를 못 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아주머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식들은 이제 다 컸다. 각자 짝을 만나 그럭저럭 산다. 그런데도 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물으니 "놀면 뭐해요. 심심하기만 하고" 했다. 그러다 진짜 이유를 덧붙였다. "나이 들어 자식들 짐 되고 싶지 않아서요. 지금 건강할 때 한 푼이라도..." 손주들 용돈도 주고 학원비도 보탤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환하게 웃으신다. 이 웃음을 뭐라 불러야 할까. 세상이 흔히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빛나는 순간도, 인정받는 성취도 없다. 그저 새벽부터 일어나 두부를 만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리를 지킨다. 하루하루가 버티는 일이고, 그 버팀이 수십 년 쌓여 지금의 삶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유난히 힘겹고 지칠 때면 '환갑 넘어 한글을 깨우친' 아주머니의 웃는 모습을 떠올린다. 매일매일이 기계적인 부품처럼 움직이는 나로 느껴질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아 심장이 무너질 때. 아주머니는 어떻게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뎠을까. 어떻게 지금 저렇게 선한 미소를 지으실 수 있을까.

답은 없다. 다만 며칠 전 아주머니가 한 말이 떠오른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 기분도 좋고, 손님도 많이 와 주시고" 소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찾는 모습. 빛나지 않아도 빛나는 삶이 거기 있었다. 두부 한 모를 살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아주머니의 정성과 더불어 삶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함께 건네받는다.

우리 사회는 이런 이야기를 종종 '미담'이라 부른다. 감동적이라 말한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건 감동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령의 생계형 상인들이 비바람 속에서도, 단속의 두려움 속에서도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구조, 그 구조를 바꾸는 일. 최소한의 복지와 안전망, 그것이 아주머니 웃음에 대한 진짜 응답이 아닐까.

오늘도 이른 아침, 전철역 앞에는 사람이 하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런 사례처럼 묵묵히 삶을 지탱하는 고령의 상인들을 단순한 미담의 대상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고에 합당한 사회적 배려와 복지 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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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와 읽기를 좋아하는 백발의 할머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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