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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대명절 추석을 맞아 책, 영화, 드라마, 여행,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꼭 챙기면 좋은 ‘필수템’을 소개합니다. 가족·친지와 함께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긴 연휴에 어울리는 추천 콘텐츠와 함께 더욱 풍성한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임신과 출산만큼 신비롭고 놀라운 일도 없을 것이다. 이는 그저 정자와 난자, 수정 같은 설명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서사다. 나는 여자의 몸을 통해 태어나 여자와 결혼하고, 그녀의 임신과 출산을 곁에서 목격하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경험했지만, 내 경험과 지식이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 갈수록 깨닫는다. 뒤늦게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 새삼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산부인과 의사인 저자가 처음으로 임신·출산하고, 양육하면서 겪고 느낀 솔직한 이야기를 썼다는 책 <출산의 배신>(오지의, 에이도스)을 바로 구입해 읽었다. 유달리 긴 추석기간 동안 자신이 거쳐온 모든 인생 서사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면 그보다 풍성한 추석 보내기도 없을 것 같아 이 책을 소개한다.

 <출산의 배신> - 신화와 비극을 넘어서
<출산의 배신> - 신화와 비극을 넘어서 ⓒ 에이도스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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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테이크아웃 커피라고 생각해보자. … 정해진 시간에 영업하는 카페에 가서, 일정한 금액을 내고, 예상 가능한 맛의 커피 한 잔을, 먼저 온 순서대로 받아온다.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사회의 규칙이다. 하지만 삼신할매의 카페는 영업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고, 언제 열고 닫는지 알 수가 없어 방문할 때마다 허탕 치기 일쑤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꺼이 공짜로 커피를 내어주지만 어떤 사람은 수천만 원이나 내야 하고, 심지어 몇몇은 제아무리 노력해도 커피를 못 가져간다. … 때로는 나보다 한참 늦게 온 사람이 먼저 커피를 받아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아무리 목 놓아 외쳐 봐도 … 그냥 아무거나 주는 대로 먹으란다."(83쪽)

무슨 얘긴지 짐작할 것이다. 임신과 출산은 약간의 수고로 원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상품에 익숙한 현대인의 오만과 상식을 자주 깨버리는 신비와 태고의 영역이다. 우리 부부 역시 결혼 후 한동안 임신이 되지 않아 애태웠다. 결혼 1년이 훨씬 지나 어렵사리 임신했던 아내는 어느 날 출근길 심한 통증을 느껴 중도에 하차해 화장실에서 아직 형체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수정체(?)를 자연유산하였다. 아내는 그것을 휴지에 고이 싸서 돌아와 몇 날을 울었다.

저자는 산부인과 전문의지만 임신 앞에서는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영락없는 초보였다.

"내 경우에는 식욕이 자제가 안 되는 '먹덧(먹는 입덧)이 고역이었다. … 위가 비는 순간 지독히 메스껍기 때문이다. … 임신은 참 희한한 일이라서, … 그냥 출출하거나 내키는 정도가 아니다. 안 먹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입맛이 난리 호들갑을 떨어댄다."(14쪽)

그러나 임신이 되었다고 모든 게 순조로운 게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여성의 몸은 자기 의지나 생각과 상관없이 모든 게 태중 아기 위주로 자동 조절된다.

"태아는 겨우 9개월짜리 세입자 주제에 엄청나게 요란한 리모델링을 한다. 물론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생식기관이다. 자궁의 용량이 최대 1000배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 임신을 한 신체는 작동 방식이 미묘하게 조절되어, 인체의 거의 모든 장기가 큰 영향을 받는다. … 더욱 놀라운 것은 … 아이를 낳고 나면 그 광범위하고 격렬한 변화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15~16쪽)

임신과 출산이 남녀 모두의 관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지만, 그 진행 과정에서 여성만이 경험하는 독박의 상황을 늘 직면한다.

"임신 전 우리 부부는 뭐든 같이 했다. … 하지만 임신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서게 되었다. 자궁도 난소도 나에게 있다. 출산과 모유 수유도 내가 해야 한다. 아무리 아기를 부부가 함께 돌본다고 해도, 여전히 재생산만큼 성별에 따른 역할 차이가 두드러진 것은 없다. … 생각할수록 억울한 마음에, 자는 남편을 괜스레 한번 꼬집었다."(20~21쪽)

예측 불가, 통제 불능

저자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많은 아기를 받았지만, 산모로서 자신이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기는 처음이었다.

"산통은 죽음에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산모를 밀어붙인다. … '이러다가 정말 똑 죽겠구나! 싶었을 때 아기가 나왔다.' 이 느낌은 사실이다. 정말로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다. … 그렇게 죽을 것만 같은 고비를 넘기다 보면, 비로소 태아가 세상 빛을 보는 것이다."(62~63쪽)

그러나 출산은 산모만의 일이 아니라 아기의 수고이기도 하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아기를 세상에 내놓으려는 엄마의 사투와 함께 어떻게든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아기의 죽을힘이 함께 발휘된다.

"탄생이 임박한 순간에 정말로 죽을 확률이 훨씬 더 높은 쪽은 산모가 아니고 태아이다."(63쪽)

28년 전 첫 아이를 낳던 때 아내도 죽을 것 같은 산통을 느끼며 이제 병원만 가면 바로 출산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운동하면 아기가 쉽게 나올 것 같아, 일부러 병원까지 걸어갔다. 그러나 기대를 걸고 도착한 병원에서 의사는 "많이 열렸지만 아직은 아니다. 집에서 조금 더 기다렸다가 어찌저찌하면 다시 와라"라며 다시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때 고통 속에서 아내가 거듭했던 말이 '도대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였다. 며칠, 몇 시간, 몇 분에 익숙한 우리에게 '때가 되면'이라는 막연한 기다림이 얼마나 힘든 시간인지 새삼 느꼈다. 그건 아무리 첨단과학 문명 시대라 해도, 한 생명의 탄생이 사람 마음대로 쉽게 좌우할 수 없는 영역임을 다시 깨닫게 한다.

신화가 된 모성

 만삭의 임산부
만삭의 임산부 ⓒ 연합=OGQ

흔히 임신과 출산의 수고에 '엄마는 이렇게 위대하고 숭고하다'는 식으로 찬사를 쏟아내거나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생명의 탄생은 아름답다'는 감탄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실제 산모와 태아는 생명의 공존을 만들어 가는 위험한 줄타기 같은 격렬한 과정을 함께 겪는다.

"아기가 자궁 안에 있을 때 아기와 엄마 간 줄다리기의 핵심은 태반이다. … 신기하게도 이러한 태반 조직은 자궁벽에 깊숙이 파고들어 … 모체의 혈액에 접근할 특권까지 가져간다. 혈액은 양분의 원천인데, 주인도 아닌 객식구가 곳간 열쇠를 당당히 가져가는 것이다. … 아무리 못 먹어도 아기는 대개 잘 자란다. … 태아는 알아서 엄마 몸에서 양분을 쏙쏙 빼먹는다. … 모체와 태아 사이의 갈등은 … 마치 약속 대련처럼 서로의 합이 잘 맞아야 양쪽 다 이득을 볼 수 있다."(183~184쪽)

"태반을 통해 막강한 공격력을 가졌던 태아는 출산과 함께 태반이 떨어지며 주도권을 잃는다. … 아기는 태반이라는 생화학 무기를 잃은 만큼, 더는 엄마에게서 직접적으로 영양을 빼앗을 방법이 없다. 하지만 칭얼대고 소리 지르거나, 웃거나, 눈을 마주치고 교감하는 방식으로 엄마를 정신적으로 공략한다."(184~185쪽)

아기가 엄마 품에서 젖이나 분유를 빠는 모습이 아주 한가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사실은 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거다. 엄마 젖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굉장한 노력 끝에야 나오게 되며, 아기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젖을 빨아 먹는다. 그래서 '젖 먹던 힘'이란 구강기 아기들에게는 모든 걸 쥐어 짜내는 수고다.

처음에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힘든 만큼, 때가 되어 익숙해진 젖을 떼고 이유식으로 바꿔 먹이려 할 때 엄마와 아기 사이에 벌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밀당과 신경전은 나도 목격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기는 의식적인 학습 이전에 독립된 인격체로서 성장하며 타자와 관계 맺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협력

임신과 출산, 양육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첫걸음이다. 이 과정에 남자도 관여했다고는 하지만, 거의 전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전가되어 왔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 양육의 모든 책임과 부담을 여성에게만 떠맡기고, 심지어 임신중절(낙태)의 책임까지 엄마에게만 물었던 제도와 관행이 오늘날 인류 소멸의 위기까지 염려하게 된 진정한 원인이 아닐까?

"초기 인류는 친척 유인원보다 더 척박한 환경에서 더 볼품없는 신체 조건으로 살아갔다. 또한 인간 아기는 요구하는 것도 많은 데다 유난히 천천히 자라서, 암컷은 장기적 도움이 필요하다. … 어린 자식을 챙기느라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도, 장거리 이동도 쉽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자기편인 수컷, 남편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 인간의 일부일처제는 … 다른 유인원 친척보다는 훨씬 단단하게 맺어진 상호 독점적 관계이다. 포유류인데도 새끼를 암컷에게 떠넘기지 않고 아빠가 나서는 장기 협력 프로젝트로 육아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독특한 장점이다. 이런 사실을 살펴보면 오롯이 희생적인 엄마에게만 재생산을 위임하는 것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199~200쪽)

갈수록 성별 차이로 인한 갈등과 적대가 심해지고 있다. 갈등과 적대는 작심하고 없애려고 한다고 당장에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남자/여자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존 그레이의 유명한 비유처럼 각각 다른 행성 사람인 '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 사이 관계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특별히 오랜 가부장 사회에서 외면받아 온 여성의 삶과 그 서사에 대한 이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임신과 출산, 양육을 통해 여성과 인류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이 책을 읽는 것은 슬기로운 추석 생활에 아주 적절해 보인다. 저자가 쓰는 브런치(https://brunch.co.kr/@follicle
)도 유익하다. 아울러 이러한 주제에 도움 될 책 몇 권을 더 소개한다.

<여성의 진화>(웬다 트레바탄, 에이도스)
<부모됨의 뇌과학>(첼시 코나보이, 코쿤북스)
<차이에 관한 생각>(프란스 드 발, 세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우즈, 디플롯)

출산의 배신 - 신화와 비극을 넘어서

오지의 (지은이), 박한선 (감수), 에이도스(2024)


#임신#출산#여성#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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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형 (ku6699) 내방

40여년 신문을 탐독한 습관을 바탕으로, 기독시민운동과 다양한 실천에 참여해 왔습니다. 이웃과 시대에 필요한 목회를 꿈꾸며, 틈틈이 택배도 하며 현장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이념과 성향, 세대를 넘어 평범한 사람과 진정한 소통을 기대합니다. 현재 광명 경실련 공동대표, 성서한국 이사장,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공동대표이며 광명에서 교회 설립을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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