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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 소도시의 작은 여행사에서 근무한다. 단체 관광을 계약하고 전세버스를 배차하는 게 주된 일이다. 그래서 관공서나 복지관 같은 기관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늘 반갑다. 새로운 거래의 시작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전화벨 소리가 반가움보다 불안부터 불러온다.

최근 정부 포털에 들어갈 때면 눈에 띄는 '사칭 주의' 안내 배너가 처음엔 남 얘기 같았다. "세상에 별 일이 다 있구나"하고 넘어갔지만, 그 문구는 어느 날 불쑥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교육기관 직원 사칭 주의 안내 배너 교육기관과의 거래시 계약 사이트에 접속하면 뜨는 직원 사칭으로 인한 피해에 주의하라는 안내 배너이다.
교육기관 직원 사칭 주의 안내 배너교육기관과의 거래시 계약 사이트에 접속하면 뜨는 직원 사칭으로 인한 피해에 주의하라는 안내 배너이다. ⓒ 안내배너 갈무리

지난 8월 말, 비수기라 한가한 오후였다. 시청 직원이라며 전화를 건 사람이 "예비 신혼부부의 신혼여행 지원 사업을 추진 중이니 직접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확인 차 무슨 과의 누구인지 물으니 그 뒤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틀 뒤엔 복지 센터를 사칭한 이가 대형 버스 3대를 예약하더니, 예산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며 1500 만원 가량의 물품을 대신 구매해 달라고 요구했다. 예약 당시 받았던 명함이 있었기에 의심하지 않다가, 기관이 전혀 상관없는 업체에 물품 구매를 부탁한다는 게 말이 안돼 직접 복지관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실제로 그 이름의 직원이 있긴 한데, 사칭을 당해 곳곳에서 피해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칭범이 위조한 명함 실제 사칭범이 전세버스 계약시 보내온 명함으로 실존하는 복지관명, 직원 이름, 복지관 주소지까지 일치했다.
사칭범이 위조한 명함실제 사칭범이 전세버스 계약시 보내온 명함으로 실존하는 복지관명, 직원 이름, 복지관 주소지까지 일치했다. ⓒ 오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서울로 가는 전세버스를 수백 대 이상 계약해야 한다며 만나자던 전화도 있었다. 역시나 착신 정지된 번호였다. 단 일주일 간 이어진 전화가 모두 사기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허탈함과 씁쓸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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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시청이나 기관과의 계약을 앞두고도 마음이 편치 않다. 상대가 실제 직원인지, 홈페이지에 이름이 있는지, 내선 번호가 맞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다. 거래처 확인 과정이 두세 배 늘어나면서 일의 효율도 떨어졌다. 무엇보다 "혹시 또 사기일까?"하는 불신이 매번 따라붙는다.

경기가 얼어붙은 것도 서러운데, 일하는 마음까지 더 팍팍해진다. 믿음을 무기로 삼는 사기꾼들은 피해자의 돈만 노리는 게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신뢰를 무너뜨린다. 전화벨이 울릴 때 반가움보다 경계심이 먼저 드는 세상,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사람은 사람을 믿어야 함께 살아 갈 수 있다. 믿음이 무너지면 피해는 숫자로 끝나지 않는다. 거래처를 의심하며 전화를 걸고, 의심 속에서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큰 상처다.

나는 여전히 회사에서 전화를 받는다. 언젠가 다시, 전화벨이 울릴 때 설렘이 먼저 찾아오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기관사칭#보이스피싱#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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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omarron) 내방

10년째 여행사를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길 위 이야기를 기록해왔습니다. 일상의 작은 경험에서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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