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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파동에 따른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다. 국가보안법 파동에 따른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다.
국가보안법 파동에 따른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다.국가보안법 파동에 따른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국가보안법은 단순한 법률이 아니라 바로 이땅의 불행한 현대사를 그 날개로 온통 뒤덮고 있는 거대한 괴조(怪鳥)와도 같은 것이었다."(변호사 박원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180여 명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칼날 아래 사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통계조차 나와 있지 않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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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제정된 1948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보안법처럼 국내외적으로 논란과 곡절을 많이 겪은 법률도 드물 것이다. 여수·순천사건 직후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법보다 먼저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58년 12월 소위 보안법파동, 60년 민주당집권 때 폐기,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강화, 91년 5월 노태우 민자당에 의한 날치기 개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경위권이 발동된 가운데 자유당 단독으로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이른바 '보안법파동'은 자유당 정권의 정권 연장을 위한 하나의 폭거였다. 그해 5·2총선거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갈수록 지지기반을 상실해간 이승만과 자유당은 그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 부심해오던 중 60년의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발을 묶고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릴 목적으로 국가보안법을 강화하는 데로 눈길을 돌렸다.

자유당은 이와 같은 숨겨진 목적 아래 내세우기는 간첩을 색출하고 좌경세력을 발본색원한다는 명분을 들어 그해 8월 11일 신국가보안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자유당 지도부는 정부와 사전 협의를 거쳐 만든 전문 3장 40조, 부칙 2조로 된 신국가보안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간첩행위를 극형에 처하게 하되,

① 간첩활동의 방조행위에 대해 범죄구성의 요건을 명백히 하며
② 간첩죄 피고인의 변호사 접견을 금지하며
③ 상고심제도를 폐지한다는 3대원칙이 담겨져 있었다.

자유당의 이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민주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은 "간첩개념의 확대규정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언론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탄압하려는 저의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고, "변호사의 접견금지와 3심제의 폐지는 명백한 헌법위반"이라며 반대에 나섰다. 일부 언론도 정부 여당의 의도를 간파하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민주당과 무소속 의원 95명은 '국가보안법개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백남훈, 지도위원에 조병옥·곽상훈·장택상 의원을 추대하여 범야 연합전선으로 저지투쟁에 나섰다.자유당도 이에 맞서 엉뚱하게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 장택상 의원을 회유하여 위원장으로 추대함으로써 범야 연합전선의 붕괴를 기도하면서 강행 통과를 서둘렀다.

이승만 정권은 그동안 무리를 거듭하면서 이 대통령의 3선에까지 이르렀는데, 60년 봄으로 예정된 4선을 위해 국민의 지지보다는 보안법으로 억압통치의 장치를 만들어서 영구집권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1958년 재판정에 선 진보당 당수 조봉암.
1958년 재판정에 선 진보당 당수 조봉암. ⓒ 자료사진

이러한 책략에서 58년 1월 31일 차기 대통령선거의 강력한 라이벌의 하나인 진보당 조봉암 위원장 등 간부 7명을 간첩혐의로 구속하고, 이미 시효가 만료된 미군정법령 55호까지 꺼내어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는 등 야만적인 정치공작의 법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괴조'는 반세기도 훨씬 지난 2014년 11월 헌법재판관들의 손을 빌어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기까지 불사조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정치적인 목표를 '오로지 재집권'으로 설정한 이승만과 자유당은 야당과 국민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보안법의 강행 처리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거칠 것이 없었다. 12월 19일 법사위에 상정하여, 야당 의원들이 식사하러 간 사이에 자유당 의원만으로 3분 만에 기습 처리하는 변칙성을 보여 주었다. 이때의 날치기 수법은 역대 독재정권의 국회 날치기의 교범이 되었다.

자유당 의원들의 기습작전으로 법사위에서 허점을 찔리고 만 야당 의원들은 법사위의 변칙처리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의사당 안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두 당은 협상을 벌였지만 무위에 그치고, 제1공화국의 의정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되는 12월 24일이 다가왔다.

무술경위들이 의사당의 모든 출입문을 차단시키고 있는 가운데 한희석 부의장의 사회로 자유당 소속 의원들만으로 본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법 절차도 무시한 채 순식간에 보안법을 통과시킨 데 이어 59년도 새해예산안과 12개의 세법개정안 등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야당활동과 언론규제를 목적으로 하여 2·4파동을 일으키면서 보안법을 통과시킨 자유당 정권은 법의 효력이 발생한 지 20일 만인 59년 2월 5일 서울지방법원으로 하여금 당시 정론지인 <경향신문>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내게 하고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 폐간명령을 내리는 등 정권말기적인 횡포를 서슴지 않았다.

일제가 한국 민족운동의 탄압을 목적으로 하여 제정한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보다 독재정권이 정부비판자(세력)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제정되고 실제로 악용돼 왔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국보법 개폐론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2021년 5월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이 10만 명의 동의서를 첨부하여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법제사법위원회는 이 청원과 관련 2024년 5월 29일까지 연장하는 안을 여야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나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이다.

최근 보안법 문제를 오랫동안 천착해온 언론인 출신의 글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다양한 기본권을 심각하게 제한·제약하는 유일한 법률이 보안법" (주석 1)이라며, 네 가지를 들었다.(요약)

첫째, 보안법이 제약하는 기본권의 범위가 가장 넓어 여러 헌법상 권리를 포괄적으로 제약할 수 있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제21조) 등도 보안법에 저촉되면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둘째, 보안법의 처벌 조항은 그 내용이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해석 가능성이 크다. 보안법 제7조 '찬양·고무죄'와 제10조 '불고지죄'는 '이적'이라는 개념을 매우 광범위하게 규정관리·사법기관이나 수사기관의 자의적 해석·적용이 가능하다.

셋째, 보안법은 다른 하위법보다 형벌 강도와 권리제한 폭이 넓고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까지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하위법은 위반행위에 대해 일정한 기준과 행위 위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만 보안법은 '생각'이나 '표현'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며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넷째, 보안법은 국제 인권 기준과도 충돌한다. 유엔 자유권위원회·국제 앰네스티 등 국제 기구들도 보안법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지적해 왔다. 국제인권규약(KCPR) 제10조와의 충돌을 반복 지적했고, 법 개정 또는 폐지 권고도 여러 차례했다.

주석
1> 고승우, '보안법 존재 자체로 수치... 침묵하는 국회는 응답하라', <한겨레>, 2025년 8월21일.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현대사#현대사논쟁#현대사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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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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