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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10:13최종 업데이트 25.09.30 10:13

김치처럼 우리도 자리 잡는다

외롭고 낯설게 시작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맛을 내는 존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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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식 보내줄까? 먹고싶은 거 있으면 보내줄게"

엄마의 걱정이 수화기를 넘어 귀에 꽂힌다. 하지만 나는 늘 거절한다. 엄마가 소포 보내느라 힘들까봐서가 아니다. 일본에서 한국 음식, 진짜 많이 판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서울 한복판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한국에선 음식 유행이 눈 깜짝할 새 뒤집히지만, 일본은 오랜 시간 잔잔하게 한국 붐을 이어오고 있다. 도쿄 외곽의 할인마트에 들어서자, 저 멀리 강렬한 붉은색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김치다.

한 코너 가득 메운 김치

김치 코너 한 쪽이 전부 김치로 가득했다
김치코너 한 쪽이 전부 김치로 가득했다 ⓒ 박민진

케이푸드가 인기라지만, 이건 단순한 인기가 아니었다. 변두리 마트의 한 코너를 통째로 김치가 차지하고 있는 광경. 일본인의 깊은 김치 사랑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왜 이렇게나 쌓아뒀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득 생각난다. 아, 이제 날씨가 쌀쌀해졌구나. 김치 나베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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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베는 채소와 버섯, 두부와 고기를 듬뿍 넣고 끓이는 일본식 전골요리다. 우리에겐 찌개가 밥상에 빠지지 않는 동반자라면, 일본인에게 나베는 겨울을 지탱하는 의례 같은 것. 그래서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김치 나베를 위해 김치 수요가 치솟는다.

예전에 김치 판매점에서 일했을 때가 떠오른다. 쌀쌀해지면 어김없이 김치가 불티나게 팔렸다. "김치 나베 하려는데, 어떻게 만들어야 맛있어요?"라고 묻는 손님도 있었다. 마침 우리 가게는 김치 나베용 육수도 팔았는데, 손님들은 '내가 원하던 게 이거'라며 만족하곤 했다.

일본인들에게 김치는 더 이상 "한국 음식"이 아니다. 매 순간 특별한 기념으로 먹는 게 아니라, 일상의 냄비 안에서 스며드는 음식. 외국 음식이라는 경계는 이미 희미해졌다. 김치는 여기서 이미 자리를 잡았다.

생각해보면 이 자리는 쉽게 얻어진 게 아니다. 일본인 사장님께 들은 바로는, 30년 전 일본에선 "매운 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웃지 못할 루머가 떠돌았다고. BTS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없던 시절, 한국 음식의 이미지는 지금처럼 빛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 기업이 직접 김치를 만들어 현지 입맛에 맞게 변형하며, 반찬 코너 4층 한 켠을 통째로 장악할 만큼 영향력을 키웠다.

마트 한복판, 붉은 김치 진열대 앞에 잠시 발을 멈춘다. 처음 일본에서 김치는 '이방인 음식'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냄비 속 다른 재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물 내는 중심축이 되었다. 이 변화를 떠올리면 종주국 출신으로서 뿌듯하면서도, 처음 뿌리내릴 때의 고단함이 함께 떠올라 묘한 연민이 스민다.

외롭고 낯설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받아들여지고, 결국 일상 속에 녹아드는 모습. 우리 삶도 이와 비슷하다. 처음엔 여기 있어도 되는지 망설이지만, 언젠가는 자리를 잡고, 함께 끓어가며 제 몫의 맛을 내는 존재가 되는 법이다.

#케이푸드#일본살이#해외살이#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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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진 (mjpark3) 내방

일본에서 시바견과 함께 사는 30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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