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수된 한강통, 1925년을축년 대홍수로 서울 용산 한강통(현 용산동 일대)이 물에 잠긴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매년 여름이 되면 익숙한 뉴스가 반복된다.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 침수된 강남역, 지하 주차장에서 구조되는 시민들. 2022년 8월 8일 서울 강남 일대가 물에 잠겼을 때, 시민들은 "이런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이 새로운 것일까? 정확히 100년 전, 1925년 여름에도 한반도는 '미증유의 대홍수'에 휩싸였다. 경성 시민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며 경악했던 그 홍수는 오늘의 기후재난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을축년 대홍수 100주년을 맞아 열리는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을 계기로, 과거와 현재의 재난을 비교해본다.
100년 전,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재앙

▲침수된 이촌동, 1925년을축년 대홍수 당시 한강 제방 붕괴로 피해가 집중된 이촌동 지역. ⓒ 서울역사박물관
1925년 7월, 한반도는 네 차례에 걸친 연속 홍수로 전 국토가 물바다가 되었다. 조선총독부 공식 집계로 전국 사망자 647명, 가옥유실 6363호, 가옥붕괴 1만7045호, 가옥침수 4만6813호의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액은 1억322만 원으로,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였다.
특히 경성(현 서울)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7월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59m, 인도교 11.66m, 구용산 12.74m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용산역의 열차도 물에 잠겼다.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는 아예 붕괴되어 떠내려갔다.
한강 기준으로만 집계해도 익사 404명, 범람면적 586㎢, 가옥 피해 약 3만 동(유실 5천 동, 붕괴 7천 동, 침수 1만 8천 동)에 달했다. 이재민 숫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발표 기준 경기도 4만1403명에 이르렀다.
당시 강우량도 엄청났다. 경성 기준으로 7월 전체 832.9mm, 특히 1519일 5일간 590.9mm가 쏟아졌다. 1928년 조사에서 한강 중류의 여름 3달 평균 강우량이 690mm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1925년 7월 한 달 동안의 강우량이 기존 68월 3개월 간의 평균 강우량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홍수를 '미증유(未曾有)'라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자 그대로 "지금까지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규모의 재앙이었던 것이다.

▲무너진 한강 인도교, 1925년한강 인도교(현 한강대교)가 붕괴된 장면. ⓒ 서울역사박물관
100년 후, 또 다른 '미증유'
2022년 8월 8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일대에서는 시간당 141.5mm라는 강우량을 기록해 이전 서울시 1시간 최다 강우량 공식 기록인 118.5mm를 80년만에 경신했다. 같은 지점에서 하루 동안 381.5mm가 내려 1920년 8월 서울의 일 최고 강수량 354.7mm를 102년 만에 넘어섰다.
2023년에는 충청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7월 13~17일 충남북 지역에 물폭탄이 쏟아져 사망 47명, 실종 2명의 인명피해와 시설 피해 1만2천 건이 넘는 피해가 발생했다. 전라북도 군산에서는 7월 14일 하루동안 429.4mm를 기록하며 1968년 기상 관측 이래 24시간 강수량 기록을 경신했다.
2023년 전국 평균 누적 강수량은 648.7mm로 역대 세 번째를 기록했고, 강수일 대비 강수량은 하루 평균 30.6mm로 이전보다 많았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의 강우량이 100년 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1925년 경성의 7월 강우량 832.9mm와 2022년 힌남노의 서울 최대 1일 강우량 120mm를 비교해봐도, 1925년의 강우량이 얼마나 이례적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경성부 수재도(京城府水災圖), 1925년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 당시 경성 일대 침수 지역을 기록한 지도. ⓒ 서울역사박물관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사회는 완전히 달라졌다. 1970년대 한강 유역종합개발 및 상류 다목적댐 건설로 홍수제어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근대 홍수기록 시작이후 최대 홍수인 을축년(1925년) 홍수량은 현재 한강 하류 하천설계 기준홍수량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바로 사회적 약자가 더 큰 피해를 입는 구조다. 1925년 이촌동은 한강 인도교가 끝나는 모래벌 옆의 상습 침수지대였다. 거주자 대부분이 군사기지이자 철도회사가 있는 신용산 인근으로 이주한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이촌동은 대홍수 직후인 1925년 10월에도 조선인 비율이 93%였다. 2022년 강남 침수 때도 지하 거주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망하며 주거 취약계층의 피해가 부각되었다.
또한 재난 이후 도시계획의 변화도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1925년 홍수 이후 총독부는 용산 제방의 510척(1.73.3m) 증축, 이촌동 거주 금지와 기존 주민들의 이전지 결정, 뚝섬·노량진 수원지 방수시설 건설 등의 대책을 내놨다. 2022년 침수 이후에도 서울시는 빗물 터널 등 대규모 저장 시설 확충 계획을 발표했다.
기후위기 시대, 과거에서 배우는 교훈

▲경성부근 대수해 실황 사진엽서 세트을축년 대홍수 피해 상황을 담은 사진엽서 모음. ⓒ 서울역사박물관
을축년 대홍수는 7월 6일부터 20일까지 15일간의 장마로 전국에 걸쳐 1년간 내릴 비의 80% 정도인 700~970mm의 비가 내렸고, 장마 전선이 한 달 이상 한반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전국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의 <미증유의 대홍수: 1925 을축년> 특별전(9월 26일~11월 16일)은 단순한 역사 전시를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1925년 7월 7일 필리핀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 북상해 11일에는 서해안까지 진출했으나, 오호츠크해 고기압 세력이 막강해 서해에서 좀처럼 전진을 하지 못했던 기상학적 배경까지 다룬다.
특히 이 홍수로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 등 서울 동부 일대의 문화재가 드러나기도 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의한 발굴은 1997년 이전 풍납토성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래를 위한 질문들
을축년 대홍수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재난은 반복되고, 기후위기는 그 빈도와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을축년홍수는 한강 유역에서 발생한 사상 최고의 대홍수로 남아 있으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방재 기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의 재난은 과거의 경험치를 넘어서고 있다. 100년 전 을축년 대홍수가 20세기 한반도 최악의 홍수로 기억되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 21세기의 '미증유' 재난 시대를 살고 있다.
한강 일대 홍수는 삼국 시대부터 빈번했다.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정종 3년(1400)에서 철종 10년(1859)에 이르는 460년 동안 서울 일대 홍수 기록이 170여 회나 된다.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하던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도 백제본기에 홍수 기록이 심심찮게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을축년 대홍수 발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 <미증유의 대홍수: 1925 을축년>을 마련했다. 전시는 오는 26일부터 11월 16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장면을 시각·청각적으로 체험하는 도입부 연출부터, 홍수 당시 피해를 기록한 사진·지도·문헌 자료, 그리고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유적 등 대홍수로 드러난 문화재까지 전시된다. 관람객은 과거 재난의 흔적을 따라가며, 오늘날 기후위기 시대의 대응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경험하게 된다.

▲《미증유의 대홍수: 1925 을축년》 특별전 포스터서울역사박물관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100주년을 맞아 9월 26일부터 11월 16일까지 특별전을 개최한다. ⓒ 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