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순혁이는 자타공인 야구광이다. 하지만 수업 시간엔 아예 딴판이다.
순혁이는 자타공인 야구광이다. 하지만 수업 시간엔 아예 딴판이다. ⓒ 픽사베이

순혁(가명)이는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자타공인 야구광이다. 늘 책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와 공, 유니폼이 들어 있을 정도다. 지금껏 그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그의 공을 받아본 이들은 이구동성 그의 구속이 얼추 120km에 육박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순혁이는 수업시간이 힘들기만 하다.

고2인 정원(가명)이는 역사 공부에 죽고 못 사는 역사 마니아다. 지금껏 전국 단위 모의평가 한국사 영역에선 단 한 문제도 틀린 적이 없고, 고1 때 한국사 내신 성적도 압도적인 1등급이다. 그에겐 내신 등급이 1등급인지 아닌지보다 100점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문제다.

그렇듯 한국사를 섭렵하고, 고2 때는 당연히 세계사 교과를 선택했다. 기실 그의 주전공은 한국사보다 세계사다. 상투적일지언정 '움직이는 세계사 교과서'라는 말보다 그를 더 잘 설명해 낼 수 있는 표현은 없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시콜콜한 내용조차 손금 보듯 훤하다. 하지만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장벽이 있다. 바로 수학이다.

AD
순혁이와 정원이는 각자 흥미와 적성 분야가 명확하고 남다른 특기를 지녔지만, 학교 내에선 '모범생'으로 대우 받지 못한다. 되레 수업을 방해한다며 '문제아' 취급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대입에도 지장이 크다. 현행 대입 체제에서 수학을 포기하면, 이른바 '좋은' 대학을 넘볼 수 없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대입의 열쇠는 수학이 쥐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지금의 학교생활이 두 아이의 미래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할뿐더러 자존감을 시나브로 허물어트리고 있다는 점이다. 수십, 수백 명이 모인 단체 생활에서 그들이 지닌 '장점'보다 '단점'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그들 역시 '칭찬'보다 '꾸지람'에 길들었다.

학교와 교사도 할 말은 있다. 의무 교육인 보통 교육 체제에서 야구만으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줄 수 없으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교과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트 체육'에 대한 성찰과 고교학점제의 도입도 같은 맥락에서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수학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이라는 설명은 전가의 보도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며, 수학 교사는 물론, 모든 교과 교사들이 두루 인정하는 바다. 대학의 전공과도 무관하다면서, 대입에서 수학 영역의 비중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교양'을 위한 교육이라는 주장

한마디로 누구든 수학을 비롯한 교과 공부에 소홀해서는 안 되고, 앞으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거다. 전문적인 분야는 고등교육을 통해 익히되, 초중고 학창 시절에는 '교양'을 충분히 쌓아야 한다는 논리다. 현행 교육과정도 이러한 취지를 반영하여 개정되었다.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교양'을 쌓게 하는 건 교육의 본령 중 하나다. 참고로, 일본에서 번역된 '교양 교과'의 원문은 'Liberal Arts'다. 직역하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기술'쯤 되겠다. 서울대 교표에 적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서 구절과도 맞닿아 있다.

정작 중요한 건, 대입 준비에 매몰된 지금의 교과 수업으론 '교양'을 쌓게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과서보다 문제집을 더 중시하는 기존의 문제 풀이 수업과는 차라리 상극이다. 하여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등장한 게 '융합 선택 과목'이다. 교과 간의 벽을 허물겠다는 뜻이다.

예컨대, 국어의 경우 '매체 의사소통'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었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탐구한다는 취지다. 수학의 경우엔 '수학과 문화'라는 과목이 있다. 다양한 문화 현상을 수학의 개념과 원리를 통해 해석하고 탐구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영어도 실생활에 유용하도록 '미디어 영어'와 같은 과목이 생겼다. 영어 위주의 미디어 활용 능력을 기르고 창의적 콘텐츠 제작 기법을 공부하도록 했다. 역사에서도 '역사로 탐구하는 현대 세계' 과목을 개설해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는 세계 시민의식 함양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입에 안 나오면, 공부도 안 한다

 대입과 수능의 시계에 맞춰 ‘고3 자습’은 ‘국룰’이 됐다. 이렇듯 요지경 속인 현실에 고교학점제까지 전격 시행되면서, 학교는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대입과 수능의 시계에 맞춰 ‘고3 자습’은 ‘국룰’이 됐다. 이렇듯 요지경 속인 현실에 고교학점제까지 전격 시행되면서, 학교는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 연합뉴스

그러나 이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등급을 산출하지 않는 데다 수능에도 출제되지 않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전 교육과정의 선택 과목 수업에서 익히 봐 왔던 풍경이다. 대입에 도움이 안 되는 과목은 대개 자습 시간으로 파행 운영된다.

교육과정 편성표는 다채롭고 화려하지만, 막상 교실에 가보면 모든 수업이 획일적으로 대입에 맞춰진다. 곧, '매체 의사소통'과 '수학과 문화' 시간에 수능 국어와 수학 영역 시험을 대비하는 식이다. 과거 교내 시험의 경우, 수능 과목 시험을 치러 선택 과목 성적에 반영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나마 수업 시간엔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라도 있지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는 목불인견이다. 답안지를 받자마자 찍고 엎드려 자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유는 단 하나, 대입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인데, 차라리 그 시간 쪽잠을 자두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이러한 고등학교 교실 풍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솔직히 새삼스럽지도 않다. 교육과정은 숱하게 개정되었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나날이 악화해 왔다. 장담하건대, 교육과정의 취지를 살려 학사 운영을 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 학사 운영의 기준은 오로지 대입과 수능이다.

대입과 수능의 시계에 맞춰 '고3 자습'은 '국룰'이 됐다. 고3의 교육과정이 대부분 '융합 선택 과목'으로 편성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는 곁눈질하지 말고 수능 준비에만 매진하라는 학교의 '배려'다. 적어도 수시 전형에서는 이미 고1, 고2 때 당락이 결정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요지경 속인 현실에 고교학점제까지 전격 시행되면서, 학교는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당장 수업이 부실해지고 자퇴생이 속출하는 사태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다. 교육 당국이 과거의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이 참담하다.

교육에 대한 시각과 철학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정답'은 나와 있다. 모든 이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교육을 바라보는 시각과 철학이다.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고 성숙한 세계 민주시민으로 기르는 일, 그 외에는 모두 껍데기다.

역대 정부의 교육개혁은 '개악'으로 점철됐고, 애꿎은 아이들만 조리돌림당했다. 순혁이와 정원이를 나무랄 순 없다. 그들의 무기력은 '사회적 산물'이다. 우리 교육에 대한 시각과 철학을 바꾸면, 그들도 엄연한 '모범생'이다.

사족. 글을 마무리하려니, "대안을 제시하라"는 말이 환청처럼 들린다. 이미 칼럼을 통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여기에 개조식으로 다시 열거한다. 얼마든지 반론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동시에 돌아가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라고 확언할 수 있다.

첫째, 모든 교과의 내신 성적을 절대평가로 하고, 수능을 자격 고사화할 것.
둘째, 교육대와 사범대의 교사 양성 과정과 임용 시험 방식을 혁신할 것.
셋째, 독서 교육을 강화하고 교과의 벽을 허물 것.
넷째, 교과 수업의 시수를 줄이고, 단체 활동 등 비교과 활동 시간을 대폭 늘릴 것.
끝으로, 학교의 일과 중 스마트 기기 사용을 제한하고 '멍 때릴' 시간을 확보할 것.

#교육개혁#2022개정교육과정#융합선택과목#고교학점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재

아이들은 나의 스승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1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