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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광화문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희생자를 위한 4대종단 추모회에 참석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사진 가장 오른편에 서있는 분이 최상규 피해자이다.
지난 9월 광화문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희생자를 위한 4대종단 추모회에 참석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사진 가장 오른편에 서있는 분이 최상규 피해자이다. ⓒ 류이 감독 제공

최상규씨는 부모님의 피해 사실을 적어놓은 기록을 앞에 두고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 표정에서 깊은 슬픔과 분노가 보였다. 최씨가 부모님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머릿속에 스스로 되뇌는 말은 언제나 같다. '내가 직접 가습기에 살균제를 넣어드렸다가 결국 내 손으로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니냐'는 자책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2000년 당시 제품의 유해함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고, 제품은 시중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광고에도 안전하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최상규씨 부모님이 사용할 당시에 누구도 위험을 경고하지 않았고 살균제를 쓰는 것이 가족의 건강을 위한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흐르며 가습기살균제가 부모님의 생명을 앗아간 주범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깨달음은 곧 죄책감으로 바뀌어 지금도 최씨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최씨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살았다. 도시처럼 미세먼지와 매연이 가득한 곳도 아니었고, 오히려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겨울이면 건조해지는 방안 공기 때문에 부모님의 호흡기 건강을 위해 가습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더 건강해져야 한다는 광고 문구와 설명서를 믿었고 의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살균제를 함께 사용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공기가 가장 깨끗했던 시골에서 독성 살균제를 들이마시게 되었고, 그것이 부모님의 삶을 갉아먹는 독이 되었다.

2000년 4월부터 몇 년 동안, 매년 10개월여간 가습기 살균제를 넣은 가습기를 틀었던 어머니는 결국 2005년 3월 밭일을 하시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단국대 병원에서 뇌출혈 수술을 하고 난 후 오랜 투병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곁에는 늘 가습기가 있었고, 아버지 역시 요양원과 병원을 오가며 같은 제품을 쓰는 가습기 옆에서 생활하다 2009년 생을 마감했다.

같은 제품, 같은 환경인데... 정반대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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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규씨는 두 분을 모두 떠나보내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 곁에서 직접 살균제를 채워 넣었던 기억 때문에 지금까지도 잠을 설친다. 자신이 그 손길을 멈추었다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반복되었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최씨는 단순한 유족이 아니다. 현재까지도 코막힘과 호흡 곤란, 비염과 축농증으로 고통을 겪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국가에 의해 또 한 번의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는 부모님의 죽음을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인정받기 위해 2017년 9월 아버지, 2018년 9월 어머니에 대한 피해 구제를 신청했다. 동일한 가정, 동일한 제품, 동일한 생활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두 분에 대한 판정 결과는 전혀 달랐다. 2020년 9월 어머니는 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아버지는 같은 폐 질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 2월 '관련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 같은 집, 같은 공기, 같은 생활이었는데도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심사위원회는 왜 이런 판정이 나왔는지 근거를 공개하지 않았고 피해자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 한쪽은 피해자, 다른 한쪽은 무관하다는 결과는 결국 가족을 두 번 무너뜨린 셈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오래전부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을 써왔다. 같은 자료와 같은 증언을 내도 판정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었다. 최상규씨의 사례는 그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같은 환경에서 살았는데 다른 판정을 받았고, 본인 역시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겪지만 온전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한 가족의 판정 결과에만 있지 않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기업의 책임을 넘어 국가의 책임이 분명히 얽혀 있다. 특히 위험한 제품에 대해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한 환경부의 책임이 크다. 또 피해 구제 제도를 운영하는 환경산업기술원은 피해자의 진술과 생활환경을 형식적으로만 다룬다는 비판을 받는다. 피해자들은 조사와 판정이 불투명하게 이루어진다고 느끼고 국가가 스스로의 책임을 줄이기 위해 심사 과정을 자의적으로 운영한다고 말한다. 심사 기준은 공개되지 않고 결정 과정은 비공개이며 피해자에게는 알 권리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불신은 다른 피해자들의 사례에서도 반복된다. 비슷한 사망사례인 이장수씨의 경우, 딸의 사망에 대해서는 환경부가 가습기살균제 노출 사실을 인정했다(2019년 5월 27일). 그러나 2024년 8월 28일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위원회이 내놓은 구제급여 신청에 대한 결과는 '피해자로 인정할 수 없다'였다.

같은 자료와 증언을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결론이 내려졌고 이러한 결론에 대해 피해자는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같은 제도 안에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을 경험하면서 심사 제도가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책임을 줄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불신을 키우는 제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

국가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수많은 사망자와 환자를 낳았고 피해자는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와 판정은 여전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고, 피해자는 반복해서 좌절한다. 환경부는 제품 관리와 피해자 구제 모두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환경산업기술원은 피해자의 신뢰를 잃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심사 과정은 전면적으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동일한 조건에는 동일한 판정이 내려져야 한다. 피해자의 진술과 생활환경 기록은 단순 참고가 아니라 핵심 증거로 다뤄져야 하며 국가의 법적 책임이 분명히 규정되어야 한다. 독립적이고 피해자 중심적인 심사 기구가 설치되어야 하고, 피해자들이 제도 안에서 또다시 상처 받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

최씨의 고통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죄책감이 아니다. 그것은 부모를 떠나보낸 아들의 절망이자 불합리한 제도 앞에 놓인 피해자의 현실이며 국가와 기업이 책임을 회피한 결과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많지 않다. 정직한 인정과 투명한 책임 그리고 국가가 더 이상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제도는 여전히 불신을 키우고 있으며 피해자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다. 최상규씨의 사례는 그 절망을 가장 선명하게 증언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변상철씨는 공익법률지원단체 '파이팅챈스' 국장입니다. 파이팅챈스는 국가폭력, 노동, 장애, 이주노동자, 환경, 군사망사건 등의 인권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 그룹입니다.


#파이팅챈스#가습기살균제#환경부#환경산업기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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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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