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7월 23일 열렸던 만화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한 결의대회 ⓒ 서찬휘
1983년 세상에 나와 많은 사랑을 받은 김수정 작가의 만화 <아기공룡 둘리>. 하지만 이 만화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검열의 흔적'이 배어 있다. 둘리는 원래 '아기공룡'이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검열 규정 때문에 둘리는 공룡이 됐다. 작가는 아쉬운 마음에 아기 '희동'이를 그려낸 걸까. 둘리가 공룡이 된 배경에는 이런 시대적 상황이 숨겨져 있었다.
한때 청춘을 뜨겁게 달궜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경우는 더욱 황당하다. 이현세 작가는 주인공 오혜성의 우수와 고뇌를 표현하려 눈매를 짙게 그렸지만, 검열관은 "우울하다"는 이유로 눈 밑 그늘을 옅게 하고 '눈알'을 그리라고 요구했던 것. 이현세는 머리카락으로 눈을 가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창작 의도를 지켜냈다. 법정으로 불려나간 <천국의 신화>, 연재 중단 <고바우 영감>도 검열의 칼바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검열과 탄압'의 배경에는 독재, 계엄령, 전쟁 등이 엄연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8월 출간된 서찬휘 작가의 저서 <한국 만화 트리비아>는 이 지점을 주목하고 있다. 시대적 상황에 맞서 만화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투쟁해왔는지 생생하게 기록했다. 만화계의 질곡과 저항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서사다.
서 작가는 "윤석열 비상계엄이 성공했더라면 사회 전체가 순식간에 붕괴하고, 만화가와 문화계 종사자, 시국선언 참여자, <윤석열차>를 그린 고등학생 등 블랙리스트 대상자들이 위험에 처했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서 작가는 책에서 "2024년 12월 3일, 불법 비상계엄 사태로, 그간 (출간 전 미완성) 원고로 다룬 과거사 속 독재적 맥락이 단숨에 현재화됐다"고 우려하며 "생각하기 싫은 풍경이지만, 우리는 또한 지난 시기 독재 정권들이 만화를 어떻게 다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자는 '권력과 검열에 맞선 생생한 기록', '만화 산업의 부침', '만화의 가치 정립'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자 서찬휘 작가에게 지난 19일 연락을 취해 서면으로 인터뷰를 나눴다.

▲<한국 만화 트리비아> 작가 서찬휘 씨 ⓒ 서찬휘
검열과 한국 만화
- 책을 보니 검열 당시 정치적 상황에도 주목했다.
"그렇다. 나는 1998년부터 만화 정보 커뮤니티 <만화인>을 운영했고, 2005년에는 만화 언론 <만>을 운영하며 관련 정보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그렇게 쌓아 온 경험과 자료를 정리해 <한국 만화 트리비아>를 썼다. 매 중요한 순간마다 직접 현장에 서 있었기에 기록할 수 있었던 내용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남기려는 의지로 책을 쓰게 됐다."
- '트리비아' 시각으로 엮은 이유는?
"책을 처음 기획할 때 콘셉트는 '만화에 이런 일이'였다. 이는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처럼, 만화에도 흥미로운 사건과 이야기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만화사 책이 통사적 접근을 취하는 것과 달리, 나는 평론가보다는 칼럼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로서 내 시선과 경험을 중심으로 잡다하지만 의미 있는 정보를 전달하고 싶었다."
- 1996년 청소년보호법 발의와 1997년 발효를 한국 만화사에 중요한 전환점이라 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
"그로 인한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보호를 명분으로 한 이 조치는 '보수 정권 말기' 정치적 위기와 외환위기 직전 상황 속에서 터져 나와 만화계를 거대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만화가들이 대거 기소되고, 한 초임 검사의 과욕이 겹쳐 발생한 <천국의 신화> 사태(이현세 작가의 만화 <천국의 신화>가 음란물로 기소되는 사태)는 한국 만화 탄압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 됐다."
-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1990년대 후반 한국 만화계의 위기는 단순히 청소년보호법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혼란, 외환위기, 정권 교체, 대량 실업, 도서대여점 창업 유행, 초고속 인터넷 보급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청소년보호법은 그 한가운데서 공권력이 벌인 만화 탄압과 여론몰이로 큰 파괴력을 보였다. 이 법은 만화에 법이 적용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명확한 선례를 남겼고, 만화가들에게 법과 정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자각하게 만들었다."
- 독재 시절 검열 속에서 만화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저항했나.
"김성환 선생은 '경무대 똥통 사건'(1958년 김성환 작가가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만화 <고바우 영감>에서 당시 청와대를 뜻하는 경무대의 똥지게를 지는 사람도 권세가 있다고 풍자한 사건)으로 4일간 문초를 받았다. 선생님은 '유명해지려고 함정을 팠다'고 너스레를 떨긴 했지만 그 말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전두환 반란 이후에도 <고바우 영감>은 주요 검열 대상이 되어 자주 연재가 제한됐고, 1980년 8월 9일 이후 <동아일보>에서 해고 통지를 받기도 했다. 군 당국이 부담을 느껴 복직을 주선했지만, 김 선생은 연재처를 <조선일보>로 옮겨 검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비판적인 만화를 그렸다.
1986년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 노조기관지 <노동자신문>에 4컷만화 <깡순이>를 연재한 이은홍 작가가 노동자 임금인상 투쟁 지침을 담은 만화를 그렸다가 이적표현물로 지정되면서 만화가로서 국가보안법 저촉으로 구속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윤석열차 ⓒ 서찬휘 씨 제공
'천국의 신화'에서 '윤석열차'까지
-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가 음란물로 낙인찍한 사건도 있었다.
"1997년 청소년보호법 발효를 앞두고 만화가들이 검찰에 소환됐다. <천국의 신화>를 그린 이현세 선생은 음란물 작가로 낙인 찍혀 약식 기소되어 벌금을 받았지만, 정식 소송을 제기하며 5년간의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2000년 7월 23일에는 만화인들이 탑골공원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재판은 미성년자보호법이 위헌 판결을 받으며 이현세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는 만화계 전체가 나서 적극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2024년 12월 3일, 불법 비상계엄 사태로, 그간 원고에서 다룬 과거사 속 독재적 맥락이 단숨에 현재화됐다'고 적었는데.
"윤석열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사회 전체가 순식간에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다. 만화가와 문화계 종사자들도 그 수거 대상에 포함됐을 것이며, 시국선언 참여자, <윤석열차>를 그린 고등학생, 블랙리스트 등재자 등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독재 정권들이 만화를 다루던 방식과 한국 만화계의 분열된 상황을 고려하면, 만화가들이 서로를 공격하도록 공작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었다. 독재 정권에서는 특정한 '여론'을 만들어 군불이 지펴지면 모른 척 국가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법이다."
- 2022년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전시된 <윤석열차>는 당시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면서 2년간 전시가 중단됐다가 최근 제28회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이 작품이 다시 공개됐다.
"반갑기도 하면서 서글프다. <윤석열차> 사건은 지난 윤석열 정권의 옹졸함을 여실히 보였다. 정부 지원을 받는 행사가 정부를 비판할 수 없다는 논리는 공적 마인드 부재를 드러낸다. 윤석열 정부의 폭주와 파탄을 드러낸 신호탄으로 역사에 남았지만, 작품과 사건 자체가 없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크다. <한국 만화 트리비아>에는 이런 있었던 일이지만 사실은 없어야 할 사건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한국 만화 트리비아> 책 표지만화에 얽힌 개개의 사건은 각각의 편린처럼 느껴지지만, 책을 덮고 나면 한국 사회가 걸어온 질곡의 역사적 사건과 궤를 함께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 출판사 생각비행
- '만화 정화 방안'의 조항들("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잃게 하지 말 것", "등장인물의 차림새가 불량하지 않도록 할 것" 등)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답답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규제가 1980년대 이후 한국 만화의 창작 방향과 내용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나.
"1980년대 초 히트작 <아기공룡 둘리>에서 주인공 둘리가 공룡으로 설정된 것은 검열을 우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원화를 보면 둘리조차 검열 흔적이 남아 있어, 당시 규제가 한국 만화의 표현 상한선을 강제로 설정했음을 보여준다.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 이후에도 작가들은 학습된 선을 쉽게 넘지 못했고, 이러한 자기 검열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표현 욕구는 '허용된 대상'을 상정해 제한적으로 발현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 만화의 '표현의 자유'도 존중하지만, 한쪽에선 자칫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입장은.
"표현에 대한 논란은 대중 속 토론과 논쟁을 통해 평가돼야 한다. 미디어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공권력이 개입해 처벌하려 할 경우 문제점이 묻히고 사회의 문화적 자존감이 묻힌다. 죄상이 명확한 범죄는 당연히 표현의 자유로 볼 수 없다. 그 외에는 이 논란을 공개적으로 다루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끄러움을 감내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한국 만화사에서 꼭 기억해주길 바라는 장면이나 메시지가 있다면.
"<한국 만화 트리비아>에 만화가 독재적 맥락 속에서도 생존하며 만들어온 역사적 풍경이 담았다. 작가와 독자들은 서로 힘을 모아 창작과 향유를 현실 속 실천으로 연결했다. 러브콘서툰 기부 콘서트, 독자만화대상 제정, 고 백무현의 정치적 도전, NO CUT 운동 등은 모두 창작과 현실 인식이 맞닿아 가능한 사례였다. 윤석열 퇴진 시위 속 깃발에서 보이듯, 한국 만화의 에너지는 시대적 현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 책 곳곳에서 그 힘과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