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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는 연내 탈플라스틱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이 무색하게, 지난 여름 전국의 지자체에서는 거리마다 일회용 페트병 생수를 무상으로 나눠주는 '생수냉장고 사업'이 성행했다.

지자체에서는 폭염대책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생수 배포처 인근에는 대부분 냉수 공급이 가능한 음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오히려 공원에 설치된 생수냉장고의 영향으로 공원 내에는 페트병 쓰레기들이 투기되었고, 1인 1병이라는 제도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인기사업'이라는 이유로 지자체들은 내년에도 같은 사업을 시행할 것인가? 탄소중립과 탈플라스틱이라는 국제적 흐름과 국정 기조에 발맞춰 정책 방향의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강북구 Oasis, 수유교 하부 부스에서 수 십병의 새 생수병들이 쌓여있다.
강북구 Oasis, 수유교 하부 부스에서 수 십병의 새 생수병들이 쌓여있다. ⓒ 여성환경연대

'인기사업' 명목으로 전국 지자체 시행되고 있는 생수냉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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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생수를 나눠주는 일명 '생수냉장고' 사업이 전국 각지에서 운영되고 있다. 해당 사업은 2020년 코로나19 시기 노원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폭염 속에서도 선별진료소 앞으로 긴 줄을 서야 했던 시기였다. 코로나19는 까마득한 일이 되었지만 해당 사업은 '주민 인기사업'이자 폭염대책이라는 명분으로 순식간에 전국 지자체로 확산되었다.

여성환경연대는 8월 한 달 간 서울시 25개 자치구를 대상으로 생수냉장고 사업 운영 현황에 대해 질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전체 절반이 넘는 13개 자치구가 산책로 등 거리 곳곳에서 생수냉장고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함께 취합한 시민 제보에 따르면 여성환경연대 질의에 응답하지 않은 동대문구·마포구·성북구 등 자치구 뿐 아니라 강원 정선군, 경기 군포시, 경북 영천시 등 전국 지자체에서도 생수냉장고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자체별로 오아시스 냉장고, 생수터, 힐링냉장고 등 다양한 이름을 쓰고 있으나 모두 도시안전과에서 관할하는 폭염 안전대책의 일환이었다. 소요 예산을 묻는 질의에 대해 사업을 운영하는 13개 자치구 중 6개 자치구(강북구·광진구·금천구·노원구·중구·용산구)만이 응답했다. 그 결과 대부분 여름철 한두 달 동안 해당 사업에만 1억 원이 넘는 구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노원구는 힐링냉장고라는 이름으로 무려 4억 원이 넘는 예산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원구 ‘힐링냉장고’ 부스 뒷편 사용된 폐페트병이 다량 쌓여있다.
노원구 ‘힐링냉장고’ 부스 뒷편 사용된 폐페트병이 다량 쌓여있다. ⓒ 여성환경연대

5곳 현장 모니터링 결과… 무분별한 이용과 쓰레기 투기 현실

여성환경연대는 7월 마지막 주 이틀 간 강북구་노원구་도봉구་중구་중랑구 5개 자치구에서 현장 모니터링을 진행했다. 모니터링 결과 모든 현장에서 1분에 1명꼴로 이용도가 높았으며 주로 산책로 이용객과 행인들의 비중이 많았다. 또한 '1인 1병'이라고 쓰인 안내가 무색하게 여러 병을 가져가는 경우도 많았으며, 생수냉장고가 설치된 공원 안에서 마시다 남은 생수병이 발견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5개 자치구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생수를 배포하는 노원구에서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모니터링을 진행한 중계근린공원에서 냉동고 수십 대가 설치되어 매일 자치구 내 생수냉장고들로 운송될 생수들을 얼리고 있었고, 공원 한 켠에는 폐기된 페트병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노원구는 '힐링냉장고'를 홍보하면서 "무라벨 생수병을 수거하여 에코의류로 재활용"한다며 "친환경에 함께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생수병은 소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이다. 미세플라스틱을 심각하게 발생시키는 페트병 재활용 의류가 생수냉장고 사업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노원구 ‘힐링냉장고’ 사업의 일환으로 수십대의 냉동고 앞에 수백 병의 생수가 쌓여있다.
노원구 ‘힐링냉장고’ 사업의 일환으로 수십대의 냉동고 앞에 수백 병의 생수가 쌓여있다. ⓒ 여성환경연대

올여름 42만 병을 배포하겠다고 밝힌 중랑구의 망우역사문화공원 내 '중랑옹달샘'에는 상주 인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냉장고 앞 벤치에 먹고 남은 페트병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이용객과 생수 열댓 개를 가방에 담아가는 이용객을 목격할 수 있었다.

 중랑구 ‘중랑옹달샘’ 냉장고에서 일부 이용객들이 여러 병의 생수를 한 번에 가져가고 있다.
중랑구 ‘중랑옹달샘’ 냉장고에서 일부 이용객들이 여러 병의 생수를 한 번에 가져가고 있다. ⓒ 여성환경연대

공원 산책로뿐 아니라 천변 산책로 여러 곳에서도 생수냉장고가 운영되고 있었다. 모니터링을 진행한 강북구와 도봉구는 우이천을 경계로 면을 맞대고 있다. 수유교를 사이에 두고 두 자치구는 각자 생수냉장고 부스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어 중복 이용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다.

중구에서는 다른 자치구들과 같이 관리 인력을 배치하는 대신 15초에 1병씩 생수병이 나오도록 설정된 '오! 빙고!' 자판기를 설치했다. 그러나 모니터링 결과 1인당 1병이라는 원칙은 역시 지켜지지 않았다. 중구 손기정체육공원에서 생수 자판기를 지켜보던 한 주민은 "공원 화장실에 한 입 먹고 버려지는 생수들이 발견된다"며 "무료라고 하니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생수를 마구 가져가 예산낭비"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중구 ‘오! 빙고!’ 생수 자판기가 손기정체육공원에서 운영되고 있다.
중구 ‘오! 빙고!’ 생수 자판기가 손기정체육공원에서 운영되고 있다. ⓒ 여성환경연대

공공 음수대라는 대안 고려해야... 폭염취약계층에 더 유효한 대책 필요해

그렇다면 생수냉장고 사업이 운영되는 공간에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시설이 전혀 없을까? 생수냉장고 사업이 운영되는 공원과 산책로에는 대부분 이미 공공 음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름철 햇볕에 달궈져 미지근한 물이 나오더라도 잠시 물을 흐르게 두면 금세 시원한 물이 흘러나왔다. 공공 음수대의 바로 1m 옆에서 생수냉장고 부스를 진행하고 있는 부스들도 있었다. 음수대 안내판에 쓰여진 '아리수와 함께', '페트병 줄이기'를 실천하자는 문구가 무색했다.

 노원구 ‘힐링냉장고’가 운영되는 중계근린공원 음수대에 '페트병 줄이기' 안내 문구가 적혀있다.
노원구 ‘힐링냉장고’가 운영되는 중계근린공원 음수대에 '페트병 줄이기' 안내 문구가 적혀있다. ⓒ 여성환경연대

기후위기가 더욱 극심해지는 시대에 폭염 시 수분 섭취는 중요하다. 그러나 공공 음수대와 같은 식수 공급 시설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자체 생수냉장고 사업은 세금 낭비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게다가 막대한 양의 페트병 쓰레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역시 문제적이다. 모니터링 결과 서울시 내에서 생수냉장고를 운영하지 않는 자치구들은 그 대신 이동노동자 등 특히 폭염 노출이 많은 직업군이나 쪽방촌 등 주거취약계층 대상 폭염대책에 힘쓰고 있었다.

무상으로 배포되는 생수는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기에 영합해 운영되는 정책이 곧 좋은 정책은 아니다. 현재 생수냉장고 외에도 그늘막과 무더위쉼터 확충, 독거어르신과 같은 폭염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방문간호 등의 폭염대책들이 운영되고 있다. 이제는 폭염취약계층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지원과 정책이 무엇인지 지자체들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냉수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음수대의 이용 활성화도 방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문제에 공감된다면 우리 지자체(자치구)에 '나는 생수냉장고를 원하지 않는다'고 민원을 남겨보는 건 어떨까? 원하는 주민 만큼이나 원하지 않는 주민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지역의 행정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중구 손기정체육공원 내 ‘오! 빙고!’ 생수 자판기 바로 근처, 공공 음수대가 운영되고 있다
중구 손기정체육공원 내 ‘오! 빙고!’ 생수 자판기 바로 근처, 공공 음수대가 운영되고 있다 ⓒ 여성환경연대

#플라스틱#생수#음수대#생수냉장고#자원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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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창립한 여성환경연대는 에코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모든 생명이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녹색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생태적 대안을 찾아 실천하는 환경단체 입니다. 환경 파괴가 여성의 몸과 삶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여 여성건강운동, 대안생활운동, 교육운동, 풀뿌리운동 등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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