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9일은 민주당 창당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5년 9월 19일 창당된 민주당은 1954년 11월의 사사오입개헌 등 갈수록 악화되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범야권 단일야당 결성운동의 결과였다. 그 이후 민주당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한 축으로서 평화적 민주화 이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민주당은 1997년 12월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당선으로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집권 여당이 되었고 그 이후 노무현-문재인-이재명 등 민주당 출신 후보들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전통적인 보수 주류 세력에 맞선 대안 정당으로 성장했다.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 그리고 리버럴 세력'을 당의 기반으로 하여 성장했으며 최근에는 전통적인 진보 세력 일부까지 포괄하면서 거대 정당이 되었다. 1955년 창당 이후 민주당은 오랜기간 소수 야당으로 지냈고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후에도 소수 여당이었다가 비교적 최근부터는 의회 다수당의 지위를 연이어 차지하면서 한국 정치를 대표하는 양대 정당의 하나가 되었다.

▲청년 김대중1954년 30살의 청년 김대중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이러한 민주당 70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김대중은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될 때부터 관여했고 1956년 민주당에 입당한 이후 민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민주화운동과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2009년 서거할 때까지 54년 동안 민주당과 함께한 김대중의 정치역정은 민주당의 역사이기도 하다.
김대중과 민주당의 관계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주된 시기는 1963년 6대 국회 이후부터여서 민주당 창당 과정 및 장면 정부 시절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런데 이 시기 30대였던 소장 정치인 김대중과 민주당 관련 내용은 오늘날 민주당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민주당 창당 70주년을 맞이하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최근에 '1950년대 김대중과 민주당의 관계'를 주제로 공개한 4개의 사료 중에서 '민주당 입당 성명서'(1956년 9월 25일)와 1950년대 후반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시절 장면 부통령 등과 함께 촬영한 사진을 통해서 '민주당 창당과정에서 나타난 김대중 노선의 의미'와 '장면이 김대중에게 준 영향'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기획으로 작년에 출간된 '김대중육성회고록'(한길사)의 내용을 참조한다.
민주당 창당과정과 김대중의 연합정치노선

▲김대중육성회고록2024년에 출간된 김대중육성회고록(한길사)입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1954년 11월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하면서 민주주의 원칙을 파괴하였다. 갈수록 심화되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기 위해서 범 야권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한 신당결성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때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조봉암까지 연대해야 한다는 민주대동파와 조봉암의 참여를 반대하는 자유민주파 사이의 노선 대립이 발생했다. 당시 청년 정치인이자 시사평론가로서 활동하던 김대중은 민주대동파의 입장을 지지했었다. 김대중은 '김대중육성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 나는 거대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기 위해서는 조봉암 선생까지 포함해서 다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115페이지)
조봉암은 신당에 참여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자유민주파는 조봉암에 대한 색깔론까지 제기하면서 조봉암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또한 자유민주파가 민주대동파보다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결국 조봉암의 신당 배제가 확정되었다. 그와 같은 흐름 속에서 1955년 9월 19일 자유민주파 중심으로 민주당이 창당된 것이다.
김대중은 여기에 실망하여 민주당이 창당될 당시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대중이 조봉암 노선을 지지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어서 다음 해인 1956년 5.15 대선에서 조봉암이 출마했을 때 김대중은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이 범 야권 신당운동 당시 조봉암과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강고한 이승만 독재에 맞서기 위하여 폭넓은 민주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년 김대중의 입장은 훗날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야당과 재야사회운동 세력 사이의 연대를 강조한 것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민주당 창당과정에서 민주대동파를 지지한 청년 김대중의 모습은 김대중 정치의 본령 중의 하나인 연합정치노선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장면의 총애를 받은 김대중, 장면 정치로부터 두 가지 영향을 받다

▲민주당 입당 성명서1956년 9월 25일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 성명서, 해당 사료에 나와 있는 김대중의 한자 이름을 보면 金大仲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오기(誤記)가 아니고 그 시기 ‘대중’의 한자를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후에 대중(大仲)에서 대중(大中)으로 한자 이름을 바꿨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민주당이 창당될 때 참여하지 않았던 김대중은 1년 뒤인 1956년 9월 25일 성명을 발표하고 민주당에 입당한다. 김대중이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 것은 민주당 신파의 리더인 장면과 정치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과 관련이 깊다. 그 시작은 1956년 5.15 대선 때 김대중의 장면 지지 선언이었다. '김대중육성회고록'에서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 장면 부통령 후보를 지지했어요. 그런데 신익희 후보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대통령 후보 중에서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고 장면 부통령 후보만 지지했어요. 그때 장면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성명서를 낸 것이 언론에 나오기도 했습니다.(119페이지)
그리고 대선 이후인 1956년 6월에 김대중은 장면을 대부(代父)로 하여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장면과의 인연을 넓혀가던 김대중은 그해 9월 민주당에 입당하여 신파 소속 소장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장면은 총명하고 성실한 김대중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4.19 이후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으로 기용할 정도로 총애했다.
30대 후반 소장 정치인 김대중은 제2공화국 내각 수반인 장면 총리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장면의 정치리더십에서 두 가지 내용을 배웠다. 하나는 귀감이 될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면교사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 둘은 김대중이 정치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매우 큰 영향을 준다.
귀감이 되는 내용은 외교를 중시한 장면의 정치적 관점과 태도다. 장면은 초대 주미대사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 파병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정도로 외교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이처럼 국제적인 식견과 감각을 갖고 있던 장면을 통해서 김대중은 외교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김대중이 1963년 6대 국회 등원 이후 외교·안보·통일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대통령 재임 중에는 한반도 주변 4대 강국과 북한까지 포함한 주변 모든 국가와 가장 좋은 관계를 구축하여 외교의 달인으로 불릴 정도로 역사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의 결과다. 그 중 하나는 외교 전문가인 장면으로부터 받은 긍정적인 영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장면은 김대중에게 반면교사의 대상이기도 했다. 김대중은 <김대중육성회고록>에서 "그분은 난세를 뚫고 나갈 리더십이 부족한 면이 있었고 이것이 5.16쿠데타가 발생하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과오가 있었지요(121페이지)"라고 말했다. 김대중은 장면이 정치적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5.16쿠데타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서 큰 아쉬움을 토로했다.
5.16쿠데타로 이어진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큰 위기에 빠졌고 이를 막기 위한 저항운동 과정에서 김대중 자신도 매우 큰 고난을 겪었다. 김대중은 5.16을 막을 수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한 장면 총리의 리더십에 아쉬움과 안타까운 심정을 밝힌 것이다.
김대중은 엄혹한 독재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찾는 노력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절망을 희망으로, 좌절 대신 도전의지를 불태우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위대한 인간의지와 뛰어난 정치리더십의 역사적인 귀감이 될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대중은 정치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하다는 것을 오랜 전부터 강조했었는데 이는 중요한 역사적인 국면마다 정치리더십의 약화와 부재로 인한 심각한 역사퇴행을 여러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5.16 당시 장면의 경우도 해당한다. 그래서 장면은 김대중에게 반면교사의 대상이기도 했다.
70년 민주당의 역사와 김대중

▲1950년대 후반 김대중과 장면이 함께 나온 사진1950년대 후반 김대중이 민주당 중앙상무위원으로 있을 때 장면 부통령 등과 함께 촬영한 사진. 좌측부터 김대중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김상돈 민주당 의원, 장면 부통령 이며 우측 3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끝으로 창당 70주년을 맞이하는 민주당과 김대중의 관계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격동의 한국 정치사를 돌이켜보면 54년 동안 이어진 김대중과 민주당의 관계는 매우 독특하며 희귀하다.
우선 엄혹한 시간 속에서 정치적 이해관계와 변절에 따른 이탈, 그리고 정치적·인간적 좌절에 의한 포기 등이 빈번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대중의 일관된 정치노선과 실천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민주당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독재 정권의 여러 회유와 협박에 의해 큰 위기에 봉착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김대중은 뛰어난 정치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주당이 민주 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굳건히 유지하면서 민주화투쟁과 정권교체의 중심 세력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민주당은 민주적이고 역동적인 발전의 역사를 스스로 개척해가면서 노무현-문재인-이재명으로 이어지는 대통령을 배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여기에는 참여민주주의, 정당민주주의에 관한 여러 제도적 문화적 개혁을 과감하게 시도한 민주당 내부 구성원들의 혁신적인 인식이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민주당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의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민주당이 창당될 때에는 소수야당이었고 오랜기간 개헌저지선 확보가 총선의 목표였을 정도로 정치적 환경이 열악했다. 그리고 창당 42주년이 되는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소수여당이었다. 그런데 창당 70주년이 된 올해 민주당은 의회 다수당이자 여당이다. 민주당이 출범했을 때만 해도 지금같은 변화는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민주당의 여러 정치인들의 노력 그리고 민주당을 지지한 국민들 덕분이다.
민주당은 이러한 역사적 성과에 자만하지 말고 항상 낮은 자세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어려운 시절 민주당의 존립과 생존을 위해서 노력한 여러 정치인 그리고 그들을 지지한 국민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된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 2025)의 판독, 해제, 편집 작업을 맡았습니다.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으며 <김대중육성회고록>(한길사, 2024) 편집과 윤문 작업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