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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지 2년 반이 지났다. 틀에 박힌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살아온 30개월. 삶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일과는 딱히 정해 놓은 것 없이 내 의지나 상황에 따라 적절히 흘러가고 있다. 대체로 일상적인 생활은 텃밭 농사,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텃밭 농사, 독서와 글쓰기는 내가 좋아서 하는 취미 활동이다. 아내와 함께하는 활동은 은퇴하면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상황이 됐다. 지금 안정된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은퇴 후 아내와 함께하는 불편함
현직 말년에 은퇴 이후에는 여유를 가지고 취미 생활을 즐기며 자유롭게 살고 싶은 계획을 세웠지만, 집에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다. 퇴직 후에도 아내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낼 것으로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은퇴 직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아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현직에서 물러난 은퇴자, 매월 들어오던 정기적인 근로소득이 끊기니 가장과 남편으로서의 위신도 서지 않았다. 당장 생활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도,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되고, 집에서 겉도는 시간이 많아졌다.
결혼 생활 35년 차, 연애 기간을 포함하면 아내와 함께한 세월이 40년에 가깝다. 그런데도 아내와 집에서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하고 어색하다니, 원인이 뭘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긴 세월 동안 아내와 함께했지만, 지금처럼 장기간 시도 때도 없이 어떨 때는 하루 종일 삼시 세끼를 같이하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던가.
은퇴 전에는 없었다. 낮에는 직장생활로 바쁘고 밤에는 이런저런 모임과 술자리를 가지느라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휴일에 잠시 여유가 생겨도 그 나름대로 바빴다. 어쩌다가 아내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때는 마음을 내려놓는 달콤함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현직 시절에 그런 세월을 보내다가 은퇴 이후 아내와 함께하는 일상이 되풀이되니 한동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근로소득이 끊겨서 구겨진 체면과 위신으로 마음이 불편한 데다, 집안일에 대한 어정쩡한 태도로 더 불편했다. 직장 일에 쫓겨 집안일을 등한시했던 현직 때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사에 바쁜 아내를 돕는 둥 마는 둥 서성이다가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아내와의 불편함을 피해 바깥으로 나돌았던 것이다. 주로 텃밭이나 도서관에서 취미 생활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떻게든 아내와의 불편을 해소해야 집에서도 즐거울 텐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아내의 볼멘소리도 터져 나왔다.
아내에게도 휴식이 필요해, 마음 고쳐먹기로

▲글쓴이가 식사 후 설거지 하는 모습 ⓒ 곽규현
"언제까지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서성대고 있을 거야. 은퇴했으니, 집안일도 좀 도와줘."
아내의 목소리에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내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집안일에 대한 기존의 생각부터 바꿔야 했다. 직장생활로 나도 힘들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 왔지만, 아내도 가정 살림을 꾸려 오느라 심신이 지쳐있는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아들딸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까지.
나만 은퇴할 게 아니라 아내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깊은 고민 끝에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나를 우선하는 마음'을 비우고 '아내를 아끼는 마음'으로 집안일을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설프지만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쓰레기를 분리 배출하는 등 주로 아내가 해왔던 일상적인 집안일들을 함께했다.
내 생각과 태도가 바뀌니 아내도 부드러워졌다. 표정이나 말투가 아내 본래의 모습대로 온화하고 정겹다. 내가 함께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손이 빠르고 손에 익은 아내가 집안일을 많이 한다. 아내에게는 남편인 내가 집안일을 얼마나 하든 간에 어떤 마음으로 함께 하느냐가 더 중요한 듯하다. 마음이 바뀌니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아내를 아끼는 마음'이 묻어나나 보다.
"여보, 당신은 TV 보고 좀 쉬어. 오늘 집 청소와 설거지는 내가 다 할게."
"아니야,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청소기나 돌려."
이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안일을 함께하고 있다. 간혹 나는 아내를 쉬게 하고 싶고, 아내는 손에 익은 자기가 하는 게 빠르다며, 서로 하겠다고 기분 좋은 실랑이를 벌이는 정도가 됐다.
졸혼도 괜찮지만, 아내와 함께하는 삶이 좋아
몇 년 전 한때, '졸혼'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이혼하지 않은 부부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긍정적 개념의 별거라고 한다. 친구 중에도 이런 삶을 사는 친구가 있다.
은퇴한 친구는 시골에 있는 본가에 내려가 밭에서 농사짓고, 바다에서 낚시하며 살고, 친구의 아내는 기존의 부산 아파트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간간이 친구 부부는 부산과 시골을 오가며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고, 나름대로 즐겁게 살아가면서 만족해한다. 결혼 생활에 지친 부부가 독립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내와 함께 텃밭에서 무를 가꾸고 있는 모습(위), 아내와 함께 여유롭게 해변을 거니는 모습(아래) ⓒ 곽규현
어떤 삶을 살든, 인생관이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의 문제 아닐까. 나도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건 그때 잠시뿐. 아내와 따로 떨어져 살고 싶지는 않다. 아내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다. 오히려 혼자 남겨질까 봐 우리 부부는 서로의 건강을 챙기며 산다.
우리 부부가 함께하는 건 집안일 뿐만이 아니다. 마트에서 생활용품이나 먹거리를 사는 것도, 하천 변 산책로를 걷는 것도,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것도 함께한다. 특히 텃밭 농사는 나의 취미이지만 가끔 아내도 함께하는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인생에서 언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부부가 함께하며 살 수 있겠는가. 당연히 우리 부부가 각자 즐기는 생활도 있다. 나는 아내가 따로 누리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한다. 우리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지금의 삶이 인생의 황금기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