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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하지와 맥아더 왼쪽부터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미국의 역코스(reverse course) 전략으로 인한 ‘현상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의 설립 과정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학교는 명예박사 학위 1호를 맥아더에게, 2호는 하지에게 수여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식에 참석한 하지와 맥아더왼쪽부터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 이승만 대통령. 미국의 역코스(reverse course) 전략으로 인한 ‘현상유지’ 정책이 아니었다면 국립도서관의 설립 과정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학교는 명예박사 학위 1호를 맥아더에게, 2호는 하지에게 수여했다. ⓒ 국가기록원

해방 23일 만인 1945년 9월 8일 존. R. 하지 장군이 지휘하는 미 제24군단 소속 7만 2천 명 한국에 들어왔다.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 폭격을 준비하던 이 부대는 일제가 갑자기 항복함으로써 임무가 바뀐 것이다. 소련군은 이보다 앞서 8월 8일 청진에 상륙하고 13일에는 창진, 24일에는 평양에 들어 왔다.

하지는 워싱턴으로부터 한반도의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라는 '일반명령' 제1호에 따른 것이다. '일반명령' 제1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들의 오랜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기로 한 결정을 고려한 것에 조선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도 함의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조함에 있음을 조선인들은 인식할 줄로 확신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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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8도선 이남의 지역과 동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모든 통치권은 이제부터 본관의 권한에 속할 것임.

하지는 남한진주 이틀 후(9월 10일) 조선총독부 건물 제1회의실에서 아베 조선 총독으로부터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규정한 문서에 서명을 받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한 지 35년 만이다. 이로서 한민족은 간악한 일제통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주한미군을 해방군에 어김이 없다.

하지 장군은 미합참 본부와 연합군 총사령관으로부터 다음의 수행할 임무를 명령받았다.

(1)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며 항복조건을 실행할 것. 그리고 한국으로부터 일본제국주의를 제거할 것.

(2) 질서를 유지하고 민주적인 방침에 따라 효율적인 정부를 수립할 것. 그리고 한국 독립의 기반으로서 건전한 경제를 재건할 것.

(3) 조선인들 스스로 그들 국내의 제반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자유독립국가로 그들 자신 통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킬 것.

그런데 하지는 미 합참본부의 지침과는 크게 다른 시책을 폈다.

항복문서 조인식이 끝나자마자 하지는 조선 총독과 그밖의 고위 일본 관리들이 군사정부의 통치와 민간정부에로의 순조로운 전환을 위하여 잠정적으로 그 직원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현존하는 정부체제를 통하여" 통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즉 현존하는 일본의 체제를 통하여 한국을 다스리겠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9월 6일에 부임한 해리스 장로는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인 엔도와의 회견에서 한국은 미 점령군의 감독 하에 계속 일본 총독을 통하여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주석 1)

앞에서 1945년 9월 10일 아베 조선 총독이 하지에게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조선이 해방되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일제는 조선에서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1944년 국내에서 조식한 조선국 동맹(미군 도착 작전에 조선인민공화국 으로 개칭)과 중경에서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협력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는 일제의 항복을 받고 총독과 고위 간부들을 곧 추방하거나 감금하지 않고 총독부 기능을 이어받고 그들의 자문을 통해 한국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적대시하였다. 그리고 악덕 지주 등 친일파들이 미군정에 끼어들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제24군단(주한미군-필자)은 필리핀과 오키나와에서 오랫동안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니 전후 단계에서 민간 통치를 다뤄본 경험은 없었다. 그 부대에는 또한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하지 자신도 한국의 독립문제, 다양한 정치적 임무들을 다루는 방법, 한국에서 일제의 잔재를 제거하는 문제 등에 대하여 구체적인 지침을 거의 혹은 전혀 전달받지 못하였다. 한국문제에 대한 보고서는 거의 없었으며 그가 한국 업무에 착수하기에 앞서서 입수할 수 있었던 정보도 거의 없었다. (주석 2)

그는 맹탕 수준에서 남한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1945년 9월 7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평양미국육군 최고지휘관 육군대장 더글러스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 제2호 조선주민에게 포고함>에서 "본관을 본관 지휘 하에 있는 점령군의 보전을 도모하고 점령지역의 공중치안질서의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일정한 조처를 명시하였다. 여기서 '점령군'으로 표기하고 있다.

제1호 포고문 첫줄에서 미군이 조선의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고, 그밖의 내용도 점령군의 통치에 순응한다는 것이며, 제2호 포고문에서는 '사형'까지 들먹이며 복종을 강요했다.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미군이 조선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대신해서 통치하러 들어온 것이었다. 9월 9일에 소개한 소련군 사령관의 포고문과는 개념이 달랐다.

남한을 '통치'하러 온 것이라면 미군이 한국인보다 일본인을 더 가깝게 느끼고 믿은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피터지게 싸우던 것은 지난 일이고, 조선 통치의 후임자로서 인수인계를 받는 입장 아닌가. 통치의 노하우를 넘겨주는 것이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의 일본 통치에 대한 반항적 자세를 자기네 통치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주석 3)

주석
1> 조순승, <한국분단사>, 64쪽, 형성사, 1983.
2> 앞의 책, 62~63쪽.
3> 김기형, <해방일기(1)>, 227~228쪽, 너머북스, 2011.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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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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