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발령(1895)은 을미사변과 함께 을미의병 창의의 동기가 되었다. ⓒ 자료사진
1895년 8월에 발생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민심이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김홍집 내각은 그해 11월 15일 건양(建陽) 원년 1월 1일자로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변경하고, 동시에 조칙 2호로 전국에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역법은 그렇다치고 단발령은 유교 전통에서 살아온 조선인에게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미우라 주한일본공사의 지휘 아래 명성황후가 경찰, 군인, 낭인, 친일한국인 등의 혼성부대에 의해 칼에 맞아 숨졌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황후를 죽인 일본인들은 시신을 우물에 던졌다가 다시 꺼내어 불태웠다. 이런 참극으로 온 백성이 분노하는 속에서 국왕 이하 정부 대신들이 앞장 서 머리를 깎고 전국적으로 단발이 강행되었다.
고종은 단발령 선포와 함께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인다면서 "짐이 발(髮)을 단하여 신민에게 고하노니, 백성들은 짐의 뜻을 극체하여 만국으로 병립하는 대업을 이루게 하라"고 선포하고, 태자와 당일로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등청하였다. 대신들도 뒤를 따랐다. 정부는 단발의 이유로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배경은 딴 데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자 김홍집 내각을 통해 개화의 구실로 단발령 시행을 강요한 것이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오랜 유교 윤리에서 머리를 길러 상투를 트는 것이 인륜의 기본인 효(孝) 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신체와 머리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므로 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근본이란 생각이었다. "'두가단 발부단(頭可斷髮不斷)' 즉 머리가 잘리더라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라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유교적 가치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려는 단발령이 쉽게 먹혀들 리 없었다. 그것도 일본의 강요에 따른 조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크게 격화되었다. 배일 감정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전국의 유림을 중심으로 재야 선비·유생과 평민들까지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 반대를 외치면서 각지에서 의병으로 봉기하였다. 단발령은 의병 봉기의 촉진제가 되었다.
당시 내부대신으로 광무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정부의 개혁작업을 지휘하던 유길준은 단발을 거부하는 유림의 거두 면암 최익현을 잡아가두고 단발을 강요했다. 유림들의 단발을 강행하기 위해서는 수장격인 최익현의 단발이 중요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 단발령에 복종하는 것은 곧 불효(不孝)의 대죄를 짓는 것이며, 동시에 왜(倭)에 순종하는 굴욕이었다. 불시의 단발령으로 장안의 인심은 흉흉해졌으며, 도처에서 곡성이 진동하는가하면 서울에 왔던 지방인들은 머리를 감싸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바빴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자극되었던 배일 감정이 단발령으로 폭발하여 은퇴한 원로 특진관 김병시(金炳始)를 비롯하여 많은 선비들이 반대상소를 올렸으며, 전국의 유생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등 완강하게 저항하고 나섰다.
유학자 송병선(宋秉璿)은 책을 안고 천마산으로 들어가면서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라고 일갈(一喝) 하였고, 기우만(奇宇萬)은 "나라는 망하지 않는 법이 없으니 머리를 깎이고 나라를 지키기보다는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다가 망하는 편이 낫다."면서 상소를 올려 비분을 토로하였다. 학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단발의 이로움은 없고 해로움만 보이기 때문에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상소하고, 대신직을 사임하였다. 또한 유생 이진상(李震相)은 <의제론(衣制論)>을 지어 그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정미의병(1907).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1895)은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 자료사진
이 같은 유학자들의 항거와 의병 활동에 대해 정부에서는 친위대를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으나 배일 기세는 더욱 심해졌다. 얼마 뒤에 김홍집은 결국 피살되고 친일 내각은 무너지게 되었다.
단발을 거부한 면암 최익현의 구속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안에서는 온건론과 강경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유림을 대표하는 면암을 구속할 경우에 나타날 상황이 내다보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힘은 이미 일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강경론이 채택되었다.
면암은 거듭되는 조정의 단발 요구에 "내 목은 자를 지언정 내 뜻만은 빼앗을 수 없다."고 오연하게 버텼다. 면암으로 대표되는 유림과 사대부, 평민들까지 일반적으로 국모시해와 단발령은 주체만 일본과 조정으로 다를 뿐 반역과 부도(不道)에는 마찬가지라는 인식이었다.
이들은 어떤 경우라도 국모를 살해한 일본에는 개항을 할 수 없으며, 목을 자를 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발은 전국적으로 강행되고 있었다.
광무황제의 단발에 관해 선포한 조칙(詔勅)과 내부고시(內部告示)를 살펴보자. 먼저 조칙이다.
"짐이 발(髮)을 단(斷)하여 신민에게 선(先)하노니 이유중(爾有衆)은 짐의 의(意)를 극체(克体)하여 만국으로 병립(並立)하는 대업(大業)을 성(成)케 하라."
내부고시(內部告示)
금차 단발함은 생(生)을 위(衛)함에 이(利)하고 사(事)를 작(作)함에 편하기 위하여 아 성상폐하께옵서 정치개혁과 민국부강을 도모하사 솔선 궁행하사 표준을 시(示)하심이라. 범아(凡我) 대조선국 민인(民人)은 여차하신 성의(聖意)를 앙체하되 의관제도는 좌개(左開)하여 고시함.
-. 국복(國服)이 신(身)에 재(在)하니 의관은 국복 기한 전에 내투하여 백색(白色)을 용(用)함.
-. 망건(網巾)은 폐지함.
-. 의복제도는 외국제를 채용해도 무방함.
정부의 이 같은 조처는 5백년 동안 생활화되어온 의관제도의 혁명적 변경으로 국모살해의 '원수 갚음'보다 훨씬 더 심한 충격이 되었다. 상투를 자르고 망건을 폐지하고 외국의 의복을 걸쳐도 상관없다는 정부의 조처는 유림들에게는 그야말로 '말세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개화파들에게 단발령은 개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단발령을 주도하는 내부대신의 위치에 있던 유길준에게는 자신의 정치생명과도 연관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길준은 옥에 갇힌 면암에게 개화를 위해 단발을 솔선해 달라는 서찰을 보내고 이에 면암은 답신을 통해 당당하게 자신의 반대 주장으로 응수했다. 오늘의 시점에서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개화와 보수를 대표하는 당대의 두 논객의 주장을 통해 당시의 흐름(사조)과 두 진영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때 면암 최익현은 장문의 반박문을 옥중에서 집필하였는데 단발이라는 시대사조와는 상관없이 우국충정이 서려 있음을 보게된다.
면암선생께 유길준의 글(요지)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면 손가락을 끊고 다리를 잘라 부모의 명(命)을 구제하는 것이 효자의 떳떳한 도리라면 이제 나라가 병들어 시든 것을 구하려 하는 마당에 어찌 한줌의 머리털을 그리도 아끼십니까?
선생은 대신의 몸으로서 마땅히 향중(鄕中)의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국왕으로부터 머리 깎으라는 조칙이 내렸음을 알리신 다음 선생부터 먼저 머리를 깎고 솔선수범 하시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도, 무리를 이끌고 성묘(聖廟)에 나아가 통곡을 하시다니, 가령 공자께서 오늘에 계시다하더라도 머리를 깎으실 일이어늘 선생께서는 장차 이 일을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이는 선생께서 지하에 가 계신다해도 부모의 혼령이 나무라실일이요, 또 만일에 남의 나라에 가신다해도 오늘날 세계의 만국이 모두 머리를 깎고 있으며 저 청나라 사람들마저도 따아내렸던 긴 머리를 돌려깎아버려, 머리를 깎지않은 선생께서 오히려 부끄럽게 되실터이니 선생은 이를 알아 빠리 회답해 주소서.
유길준의 이러한 서찰을 받은 최익현은 즉각 붓을 들었다. 약간 긴 글이 요지이다.
괴변을 농하지 말라(최익현의 회신)
익현은 이곳 경사(京師·서울)에 붙들려온 후 혼미로 그 죄를 살피지 못하고 오직 조가(朝家·조정)의 처분만 기다리던 중 이에 성상(聖上)의 전지(傳旨) 나 법사(法司)의 고치(拷治·고문으로 다스림)도 거치지 않은 채 문득 집사(執事·유길준을 가리킴) 의 사사로운 수서(手書) 만이 내려와 처음에는 달래고 끝에가 꾸짖으며 마치 아끼어 애석해주는 듯 하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그 허실도 살피지 않은 채 풍문만 듣고 선뜻 잡아다 죄상을 따지지도 않고 다만 의론에만 맡긴다는 것은 이 모두가 권세를 잡은 사람들의 입법시행(立法施行) 하는 체모가 아니라고 이 늙은 사람은 생각한다.
그러나 보내준 글을 받아보니 그 종횡으로 농락하여 백출하는 변괴(變怪)가 보는 이의 가슴을 떨리게 하여 감히 옳게 바라볼 수도 없게 하니, 그 대치(大致·개요)는 한마디로 오늘의 사세(事勢)로 경장개혁(更張改革·갑오경장)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며, 다음은 성상께서 스스로 먼저 단발(斷髮)하셨으니 신하도 마땅히 그 군명(君命)을 따라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집사(執事)가 어깨를 뽐내며 큰소리로 온 나라를 억압해온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 늙은이가 우루(愚陋)로 방황하며 누차 그 미혹(迷惑)을 깨보려 노력하였으나 종내 그것을 이루지 못한 바로 그 내용이고 보니 여기서 불가불 한번 담판(談判)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법이 오래되면 폐(弊)가 생기고 폐가 생기면 그것을 교정해야 한다 함은 유국(有國)의 상사(常事)이며 시세에 따라 의당 그러해야할 이치로 보아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성법(成法)이 아무리 두루 아름답다 해도 그에 대한 경장변통(更張變通)의 논의는 이미 중세의 선현들로부터 내려온 바 있다.
그러니 하물며 이 말세에 당하여 백성들이 병들고 나라가 패하여 오랑캐들이 번갈아 침입해 들어오는 때에 있어서야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변혁이 진실로 옳고 개혁 또한 진실로 마땅한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개화와 쇄국, 진보와 보수 진영으로 양분된 조선 지식인, 관료사회는 개혁과 변화를 둘러싸고 이렇게 마주쳤다. 최익현은 이후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우다가 대마도에까지 끌려가서 일본의 물 한 모금, 밥 한 술도 거부하며 장렬하게 산화했다.
개화 세력에도 충분한 시대적 변화의 의지가 담겼고 위정척사세력에도 국권수호라는 명분이 따랐다. 결국 양대 세력은 조화와 수렴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무너지는 종묘사직을 붙들지 못하고 망국의 한을 함께 겪어야 했다.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