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며칠 전에는 태국 치앙라이에서 알고 지냈던 분이 전화를 했다. 비행기 표를 끊었냐고 물으며 우리더러 언제 갈 거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남쪽 나라로 떠날 날이 석 달도 안 남았다. 매년 11월 말에 떠났으니 올해도 그 무렵으로 날을 잡으면 된다. 치앙라이 여행을 계획하고 보니, 지난해 12월 3일이 떠올랐다.
치앙라이에서 들은 '황당한' 계엄 소식
2024년 12월 3일, 그때 우리는 치앙라이에 있었다. 한국을 떠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 밤, 황당무계한 일이 벌어졌다. 동남아 겨우살이를 떠날 때 지인들이 농담으로 "한국에 전쟁이 나면 그땐 어떡하지요?" 했다.
당시에는 북한과 가까이 있는 강화도 민통선 안 마을들이 여러 달 째 괴음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한동안 오물 풍선이 날아와서 불안했는데 지난해 7월 무렵부터는 상상 불허의 괴상한 소음이 북한에서 날아왔다. 견디기 어려워 정부에 호소했지만 해결이 되지 않았다. 그럴 때였으니 전쟁이란 말도 나왔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3일 저녁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국회 주변에 등장한 무장한 계엄군에게 시민들이 항의하고 있다. ⓒ 권우성
물론 전쟁이 날 리는 없지만 그만큼 우리나라의 형편이 일상적이지는 않았다.
"전쟁이 나면 한국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국제 난민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지인은 덧붙여 말했다. 농담이었지만 '난민'이란 말이 잠시 뇌리에 남았다. 그랬는데 진짜 비일상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 터졌다. 내 조국 대한민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다. 계엄이라니, 이 무슨 당치도 않은 일이란 말인가.

▲치앙라이 숙소에서 내려다본 풍경 ⓒ 이승숙
남편이 퇴직을 한 2017년 겨울부터 우리는 오래 꿈꿔왔던 동남아 겨우살이를 실행했다. 추운 겨울 동안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지내다 봄이 오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동안 동남아의 여러 나라에서 겨울을 보내곤 했다. 그중 태국 치앙라이가 지내기에 가장 좋은 듯해서 지난해 겨울도 그곳으로 갔던 것이다.
태국과 한국은 시차가 2시간 난다. 한국의 밤 10시는 태국 시간으로는 밤 8시다. 저녁을 먹은 우리 부부는 평소처럼 각자 SNS를 하고 있었다. 오후 8시 40분 쯤, 페이스북에 들어갔던 나는 믿기지 않는 뉴스를 보았다. 비상계엄이 발동되었다는 뉴스였다. 순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남편 역시 그 뉴스를 보고 "이게 무슨 말이야?" 했다.
믿기 어렵던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긴급 라이브 방송을 들으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 다행히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상황은 정리 되었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긴 시간 우리나라는 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애타는 노력을 해야 했고, 지금도 그 노력은 여전하다.

▲지난겨울 머물렀던 치앙라이의 숙소. 한 달 임대료는 우리나라 돈으로 약 25만 원 쯤 된다. ⓒ 이승숙
치앙라이는 태국의 최북단에 있는 전원 도시로, 세계적 여행지로 널리 알려진 치앙마이와도 가깝다. 또 메콩강을 가운데 두고 라오스, 미얀마와 국경이 닿아 있는 골든 트라이앵글(황금의 삼각주)과도 멀지 않다. 치앙라이주의 주도(州都)인 치앙라이는 인구가 8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도시다.
분주하지 않고 평온한 느낌이 드는 곳이라 그런지 휴식과 쉼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기온도 지내기에 좋아, 11월부터 2월까지는 우리나라의 가을과 비슷하다. 아침 최저 기온이 15도 내외이고 낮 최고 기온도 27도에서 30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추운 겨울을 피해 치앙라이로 오는 한국인 은퇴 생활자들도 꽤 있다.
지난 겨울에 치앙라이에서 지낼 때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일종의 원룸형 아파트였다. 인근에 있는 대학교 학생들과 젊은 직장인들이 주로 입주해있는 그 아파트에는 추위를 피해 온 한국인 장기 여행자들이 열 집 이상 머물고 있었다. 60,70대가 많았지만 드물게 50대 부부도 있었고 또 80대의 나이 드신 부부도 있었다. 한달 살이를 하는 분도 있었고 석 달 지낼 예정인 집도 있었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한국인 장기 여행자들에게 12월 3일 밤의 계엄 발령 소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매한가지였다. 자정이 넘도록 불 켜진 방이 많았다. 그야말로 혼돈의 밤이었다. 추운 겨울을 피해 남쪽 나라로 왔으니 한국은 살짝 잊고 지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하루를 보냈던 나날이었다. 그러나 계엄 발령 사태 이후로 우리가 묵고 있던 치앙라이 숙소는 또 다른 한국이 되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눈치를 살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많았다. 일명 '계엄을 반대하고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들과 '윤석열을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벽이었다. 숙소 입주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뜻맞고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끼리 저절로 모였다. 우리 부부는 비상계엄에 분노하며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사람들에 속했다. 우리 말고도 몇 집이 더 있었다. 그에 비해 계엄엔 반대하지만 윤석열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인은 정이 많아 타인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조심스러워 한다. 두 패로 나뉘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별 일 없는 나날이 흘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있었다.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을 때가 그랬다.

▲남쪽 나라에서 겨울 보내기 ⓒ 이승숙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기쁨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불안해하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드디어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약속을 했다. 그날 저녁 숙소 앞 가게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면서 승리를 자축했다.
돌아보니 지난겨울은 참 다사다난했다. 비상계엄 사태로 혼돈의 나날이었지만 우리나라는 훌륭히 이겨냈다.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했고, 그 마음이 모여서 나라를 구했다. 물론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이쪽이건 저쪽이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올해도 비행기 표를 끊었다. 다시 치앙라이에 갈 수 있게 되어서 좋다. 새삼 이 일상이 소중하단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가 평화로워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