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극-장場 시네마’ ⓒ 필립리
무더위가 빗겨간 가을 초입의 대학로는 늘 그랬듯이 붐볐다. 지난 12일 저녁, 공연장을 향하는 사람들로 골목은 빼곡했고, 저녁 식사를 마친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거리를 거닐었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과 마로니에 공원 일대.
극장 건물 벽면에는 가로 9미터, 세로 5미터 크기의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었고, 초록 인조잔디 위에는 빨간색 캠핑 의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머리 위로는 캠핑 조명이 주렁주렁 달려 바람에 흔들리며 은은한 빛을 흘렸다. 한낮의 번잡한 거리와는 달리, 이곳은 도시의 소음을 잠시 지워내고 새로운 무대를 준비하는 듯 보였다.
길을 지나던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춘다.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는 "우리 잠깐 앉아볼까?"라며 자리에 들어섰고, 젊은 연인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표를 끊지 않아도,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무대가 눈앞에 열리고 있었다.
헤드셋이 열어준 또 다른 극장
관객들은 무선 헤드셋을 귀에 걸었다. 순간, 도심의 소음은 사라지고 배우의 목소리와 음악만이 고막을 채웠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부모와 아이, 서로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앉은 연인, 혼자 온 관객까지 모두가 하나의 리듬 속에 묶였다.
"집 근처에서 이런 공연을 볼 줄은 몰랐네. 늘 북적이는 대학로가 오늘은 마치 야외 자동차극장처럼 같지 않니?" 한 여성 관객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대 옆 간식 부스에서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종이컵에 담긴 팝콘을 받아 든 아이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고, 줄에 선 어른들까지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실내에 익숙했던 바람에 섞여 퍼지자, 낯설어야 할 풍경은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왔다. 공연을 기다리는 순간마저 작은 축제의 한 장면이 되었다. 어느 관객은 천천히 과자를 집어들며 이렇게 말했다.
"먹을 것을 손에 쥐면서 공연을 기다린 건 처음이에요. 이런 게 바로 생활 속 예술 아닐까요?"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지나가는 행인의 시선을 사로잡다

▲‘예술극-장場 시네마’ ⓒ 필립리
이날 상영작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지원작인 창작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었다. 이 작품은 동네 여성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무대는 부엌과 거실, 골목으로 이어지고, 등장인물들은 억척스럽고 당당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들의 대사는 때로는 거칠지만, 그 안에 삶의 무게와 웃음이 공존한다.
"우리 삶이 가볍냐!"
배우들이 합창하듯 외쳤을 때, 관객은 일제히 박수로 화답했다.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세대를 넘어 공유되는 울분과 해학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싱어롱 장면이 펼쳐지자 이곳은 수줍은듯 합창장이 되었다. 몇몇은 망설이다가 이내 입술을 움직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얹었다. 그 순간 대학로의 가을밤은 뮤지컬의 무대와 현실이 겹쳐진 하나의 거대한 장으로 변했다.
"장면 속에 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같이 웃고 따라 부르니 마음이 시원해지더군요."
아이와 함께 온 젊은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래 가사에서 우리 엄마 세대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어요."
대학생 두 명은 공연을 마친 뒤 벤치에 앉아 그렇게 속삭였다.
"귀에 착 감기는 가사 덕에 부담 없이 다가왔습니다. 뮤지컬이 이렇게 편할 수도 있구나 싶었어요." 직장인 남성 관객도 헤드셋을 벗으며 말했다.
작품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사람들의 흥얼거림이 광장 곳곳에 흘러나왔고, '가시나들'의 멜로디는 대학로 거리에 오래 남았다.
극장 앞마당에서 마로니에 공원까지 이어진 축제의 흐름

▲‘예술극-장場 시네마’ 현장 사진 ⓒ 필립리
아르코예술극장의 앞마당에서 시작된 축제는 다양한 공연예술 작품 실황과 댄스필름을 상영하는 '예술극-장場 시네마'이다. 지난 12일에 시작해 오는 20일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에서 연극·창작뮤지컬·무용의 공연실황과 댄스필름을 밤하늘 아래에서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상영회가 다채로운 작품들을 공개한다. 지난해 '댄스필름 상영회'로 시작한 이 행사는 공연예술을 조금 더 편안히,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마련됐다. 그동안 극장 안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작품들을 야외 공간에서 만 7세 이상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사전 예약 없이 관람할 수 있다.
한편, 이날 상영회는 축제가 되어 파도처럼 마로니에 공원으로 번졌다. 잔디밭 위에는 돗자리를 편 시민들이 있었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삼삼오오 담소가 이어졌다. 노천카페 테라스에서는 커피잔을 든 사람들이 공연 시작을 기다리며 자리를 지켰다. 시소 근처에서는 아이들은 노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 옆에 앉은 어른들은 저녁 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대학로라는 공간이 단순한 공연 밀집 지역이 아니라, 시민들이 모여 호흡하는 살아 있는 무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은 늘 시끄럽지만, 오늘은 다르네요. 모두가 한 무대에 앉아 있는 것 같아요."
한 시민의 말처럼, 대학로는 그날 밤 열린 축제가 되었다. 이 축제는 계속 이어진다.
오는 19일(금)부터 20일(토)까지 열리는 2주차에는 무용과 댄스필름 작품이 관객을 만난다. 19일 무용 '빨래방:쌉소리', 20일 무용 '세일'(SALE)이 상영된다. 국립현대무용단의 댄스필름 신작 '검은 돌: 모래의 기억'과 '에코'(Echo)는 19일과 20일 이틀 연속 상영한다.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이 하나의 큰 무대가 되고, 예술은 시민과 호흡하며 살아 숨 쉬게 된다.
대학로라는 공간의 의미

▲예술극-장 시네마 포스터 이미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학로는 한국 현대 연극의 심장으로 불려왔다. 1980년대 이후 수많은 소극장이 이 거리에 들어섰고, 새로운 연극과 뮤지컬이 실험과 도전을 거듭하며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상업 공연이 늘고, 임대료가 치솟으면서 이 거리는 어느새 '젊은이들의 놀이터'라는 이미지에 갇히기도 했다.
그런 대학로에서 극장이 바깥으로 나온 장면은 상징적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표를 사고 자리에 앉아야만 만날 수 있던 공연이, 이제는 거리 한복판에서 누구에게나 열린다. '예술극-장場 시네마'는 대학로라는 장소가 여전히 살아 있는 예술의 터전임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강량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극장장은 "예술극장을 찾기 어려웠던 이들에게는 극장의 문턱을 낮추고, 공연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날 현장에는 아이를 안은 부모, 노년의 부부, 젊은 연인, 홀로 온 관객까지 다양한 얼굴이 한자리에 모였다.
"대학로는 늘 젊은 사람들의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우리 같은 중년 부부도 편안히 어울릴 수 있었어요."
한 부부 관객은 손을 꼭 잡은 채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공간에서 공연을 즐기니, 가족 모두에게 특별한 경험이 되었어요."
어린아이와 함께한 가족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밤이 깊어가자 전구 조명이 더 따뜻하게 빛났고, 스크린 속 무대와 현실의 관객은 경계를 잃었다. 누군가는 컵라면을 비우며 웃었고, 누군가는 배우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눈시울을 붉혔다. 도심의 바람은 선선했고, 광장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연의 여운이 오래 남았다.
'예술극-장場 시네마'는 단순한 야외 상영회가 아니었다. 그것은 극장이 거리로 걸어 나와 시민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사건이었고, 공연예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대학로의 가을밤은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