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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1909) 수어장대에서 본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사진 아래 가운데에 행궁이 보이고, 민가가 분지에 빼곡하다. 왼쪽 북 성벽이 하얀 줄로 보이고, 열린 동문 쪽과 그 왼편 위로 남한산 정상이 어렴풋하다.
남한산성(1909)수어장대에서 본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사진 아래 가운데에 행궁이 보이고, 민가가 분지에 빼곡하다. 왼쪽 북 성벽이 하얀 줄로 보이고, 열린 동문 쪽과 그 왼편 위로 남한산 정상이 어렴풋하다. ⓒ 국가유산청

왕조시대에도 논쟁은 전개되었다. 논쟁이 당쟁과 사화 등 극한으로 번지기도 했으나 단초는 논쟁이었다. 국가의 주요 사안과 정책이 토론이나 논쟁으로 발전하지 못하면서 사회가 정체되고 정쟁과 사화로 변하는 등 극한으로 치달았다.

왕조시대의 대표적인 논쟁이라면, 조선 임금 인조(1637년)가 청국군의 침략(병자호란)을 받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절박했던 상황에 대해 한 작가의 기록이다.

그 갇힌 성 안에서는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서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서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주석 1)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아 남한산성에서는 최후까지 싸우자는 척화론과 화친하여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론이 대립하였다.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서 투항하고, 척화론의 대표격인 김상현과 주화론의 주자 최병길이 심양으로 끌려가 같은 감옥에 갇혔다. 이들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였다. 뒷날 사가는 "열지자(裂紙者)도 충이고 결지자(結紙者)도 충이라" 썼다. 항복문서를 쓴 사람이나 이것을 찢은 사람이 함께 충신이라는 뜻이 담겼다.
남문 남한산성의 주 출입문인 남문. 접근성이나 지형으로 보아, 도성으로 들고나는 산성의 관문이었다.
남문남한산성의 주 출입문인 남문. 접근성이나 지형으로 보아, 도성으로 들고나는 산성의 관문이었다. ⓒ 이영천

조선후기 사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사가의 중요한 원칙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계통을 밝힐 것. 둘째, 찬탈자와 반역자를 엄하게 평가할 것, 셋째, 시비를 바르게 가릴 것, 넷째, 충절을 높이 평할 것, 다섯째, 법제를 상세히 살필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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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가 뿐만 아니라 언론인·학자·작가·정치인 등 글을 쓰고 말을 생업으로 하는 모든 직군에 해당한다. 따라서 토론과 논쟁의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가치로 하는 유교사회였다. 오늘에 이르러 성리학(주자학)이 사대주의에 물들어 양반들이 공리공담이나 일삼는 학문으로 배척되는 경향이 있으나 진면목은 크게 다르다.

성리학은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사상이고 과학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주자성리학을 기반으로 조선을 최고 선진국으로 만들었고, 율곡 선생이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임진 병자호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대동사회로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고, 영조대왕이 율곡 성리학을 기반으로 자주적인 진경시대를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석 2)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그리고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또한 퇴계와 남명 조식의 사단칠정론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변은 조선시대 논쟁사의 금자탑이다. 당시 58살의 퇴계와 32살의 고봉이 사회적 위상과 나이를 넘어서 나눈 논변은 지금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중앙학계에서 문명(文明)을 날리는 대학자였던 59살의 퇴계는 이제 학계에 이름이 갓 알려지기 시작한 33살의 고봉에게 먼저 서신을 띄워 자신의 수정안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하면 병통이 없다고 말씀해주실지 모르겠군요"라고 의견을 구한다. 조선조의 지식인들이 300년 이상 토론을 벌였던 사단칠정 논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석 3)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과 문산 이재의의 '인성논쟁'도 꼽힐 만하다.

남인이라는 당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산은 강진에 유배 중인 다산을 찾아오고, 다산이 세상을 뜰 때까지 20년간 논쟁과 교제가 이어졌다. "주자학적 사유체계의 핵심에 속하는 사단·정의 개념을 놓고 기왕의 이론을 따르려는 문산과 <맹자요의>의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가한 다산의 논쟁은 천명(天命)으로 부여받은 본성으로서의 선(善)을 실현 하려는 개인의 자주권과 실천력을 극대화하려는 다산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라는 데 의미가 있다." (주석 4)

퇴계와 남명 조식의 돈독한 우의와 논변도 깊은 의미가 주어진다. 퇴계가 유림계의 태두로서 후학들의 일탈행위를 좌시하고 있다는 남명의 지적을 받았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바로 쓰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이야기하여 이름을 도둑질하고 남을 속이려 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니 아마도 선생과 같은 어른께서 꾸짖어 그만 두게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황은 이러한 논쟁이 가지는 문제점에 대한 조식의 지적을 충분히 수긍하고 있다.

우리들은 진심으로 학문을 원하니 애초에 어찌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일 생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뜻을 세움이 득실하지 못하여 도를 지키기를 중도에 그만 두면, 때때로 입으로 천리를 말할 즈음에 부실한 소문이 사방으로 달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이 날마다 행동하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의지할 만한 곳이 없게 되면 '훔치고 속인다'는 세상의 책망을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조식의 이 말은 진실로 우리들에게 약석이 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각자 더욱 힘써서 자신에게 반성하여 실천이 입으로 말하는 천리의 근본이 되게 하고, 날마다 연구하고 궁리하며 체험하는 공부를 힘써, 지행을 함께 전진하게 하고 말과 행동이 서로 돌아보게 하여 성인의 문하에 죄를 얻지 않고, 세상에서 초일한 학자의 비판을 면할 수 있기 바란다. (주석 5)

여기서는 효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생존해 있던 인조의 계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른바 '예송논쟁'과, 조선후기 학계는 물론 정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정파성이 너무 심하여 제외하였다.

주석
1> 김훈, <남한산성>, 4쪽, 학고재, 2007.
2> 지두환, <조선시대 사상사의 재조명>, 서문, 역사문화, 1998.
3> 김기현,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①>, 68~69쪽, 길, 2000.
4> 실시학사경학연구회 편, <다산과 문산의 인성논쟁>, 뒷표지 발문, 한길사, 1996.
5> 손영식·조남호, <남명 조식의 철학사상연구>, 164~165쪽,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2.

덧붙이는 글 | [현대사의 논쟁과 쟁점]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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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논쟁과 쟁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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